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오점 많은 왕도 푸른 생명력으로 편견 없이 품었네

입력 2026. 04. 02   15:04
업데이트 2026. 04. 0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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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경기 광릉숲, 세조가 누운 공간 

야생동물 많아 세조 사냥터로 애용
동래 정씨 선산 있던 자리에 능 조성
600년 가까이 왕실림으로 엄격 관리
2880종의 동물·3344종의 식물 서식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

국립수목원 내부.
국립수목원 내부.

 

‘국립수목원’이란 이름이 붙은 광릉(光陵)숲은 경기 포천과 남양주 일대에 걸친 2425헥타르(㏊) 규모의 넓은 천연수목원이다. 숲이 울창하고 수목이 다양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받았다. 유명한 광릉크낙새와 장수하늘소 등 2880종의 동물과 광릉물푸레, 광릉골무꽃 등 3344종의 식물이 서식한다(문화재청). 이 공간에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잠들어 있다. 그 안에 국립수목원이 자리잡고 있다. 수목원은 광릉의 부속림 중 일부로 600년 가까이 왕실림으로 엄격하게 관리돼 온 공간이다. 민간에서도 ‘광릉의 나무는 왕의 것이라 베지 않는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왔다(구술 민속자료,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이 숲의 방대함에 주목해 수목원으로 변모시켰다. 능묘와 부속지를 제외한 공간에 임업시험장을 창설하고 광릉에 출장소를 설립한 것이 수목원의 연원이다(임업시험장 연보).

광복 후 1949년 10월 중앙임업시험장 직할 광릉출장소로 숲을 관리하기 시작해 1987년 4월 5일부터 ‘광릉수목원’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광릉내를 경계로 광릉과 수목원이 좌우로 나뉘고 그 가운데로 도로를 냈다. 1999년 5월 24일부터 산림청 소속 국립수목원으로 공식 출범해 오늘에 이른다(산림청 국립수목원). 산림 보호를 위해 입장객 수와 입장일을 부분 제한하고 있다.

구보는 숲길과 호수, 식물원, 습원을 따라 둘레길을 걸으며 향긋한 나무 냄새와 새소리 속에서 산림욕의 기쁨을 만끽하곤 한다. 이곳은 서어나무를 비롯해 287종의 수목을 보유하고 있다(국립수목원). 특히 옥림호 인근에 키 큰 전나무를 심어 조성한 ‘전나무 숲길’은 수목원의 자랑이다.

광릉이 수목원으로 정착한 데는 한 일본인의 노력이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다. 그는 스물세 살이던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산림국에서 임업기사로 일했다. 주 업무가 양묘여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1924년 소나무 양묘법을 개발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던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 발아촉진법’이라는 이 양묘법 개발로 기존의 2년 양묘 기간을 1년으로 단축시킴으로써 광릉수목원 조성을 이끌었다. ‘한국 인공림의 37%가 다쿠미 덕분’이라고 임업연구원은 평가한다. 전국의 종자를 채집하고 흙을 살피며 다니던 과정에서 조선 도예의 아름다움에 빠졌던 지한파이기도 했다(『조선의 산림과 공예』 『디지털구리문화대전』). 40세에 폐렴으로 세상을 뜰 때도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광릉에 잠든 세조는 1468년 재위 14년에 깊은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계유년의 정난 때 연좌된 인사 200여 명을 방면하는 조치를 취하고(『세조실록』 14년 9월 7일) 이튿날 숨졌다. 예종은 11월 28일 부왕을 광릉에 장사 지냈다. ‘석실과 사대석(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부왕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신숙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선왕을 석실에 안장했다. 그러나 1471년부터 석실을 덮은 토사가 자꾸 흘러내리고 잔디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애를 먹었다(『성종실록』 2년 7월 10일).

멀리서 바라본 광릉.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이다.
멀리서 바라본 광릉.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이다.


광릉은 숲이 울창해 호랑이 등 야생동물이 많아 생전 세조가 즐겨 찾던 사냥터였으나 능이 들어서면서부터 제사를 원활히 치르기 위해 짐승들을 쫓아냈다. 이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사냥 행사가 벌어지지 않았다(『성종실록』 8년 8월 28일). 원래 이곳은 동래 정씨의 묘역이었다. 정창손(1402~1487)은 광릉 조성이 결정되자 서둘러 선대의 묘역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정창손은 사위 김질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기도를 고하자 즉시 세조에게 고변해 영의정을 지내는 등 평생 영화를 누린 인물이다. 원비 정희왕후 윤씨가 숲속에 있던 운악사를 봉선사로 중창해 능침사찰로 삼았다. 예종이 행차해 숭은전에 제사하고 쌀 100석을 내렸다(『예종실록』 1년 9월 8일). 15년 후 윤씨가 작고하자 손자 성종이 조부의 능 옆에 대비를 모셨다.

광릉은 후손 왕들이 자주 배알했다. 숙종이 재위 18년이던 1692년 2월 전배하려다 “비 탓에 길 상태가 좋지 않고 왕의 건강도 우려된다”며 중신 갈암 이현일이 만류한 기록도 보인다(『갈암집』). 이현일은 숙종이 광릉을 참배할 때 포영사(布營使)로서 호송 부대를 엄히 단속해 이탈자가 발생하지 않게 한 공으로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한 바 있었다(『계곡집』). 정조도 광릉 전배 때 양주·포천 백성에게 세금을 감면하는 등 시혜를 베풀었으며, 순조와 철종도 나아가 친히 제사지냈다(『국조보감』).

후대 왕들이 열심으로 광릉 참배를 한 것과 달리 민심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 세조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동생 권자신이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죄를 물어 왕후의 소릉을 파해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중종 때 우참찬을 지낸 이자는 저서 『음애일록』에 ‘광묘(光廟·세조)께서 앎이 있으면 반드시 지난 일을 후회해 소릉을 복원했을 것’이라고 썼다.

광릉 참봉에 제수되면 기피하는 유인도 여럿 있었다. 거창 출신 문사 정온은 1609년 광릉 참봉에 제수됐으나 마다하다가 이듬해 봉자전 참봉에는 나아갔다(『동서기언』). 정조 때 이행상은 손가락에 피를 내 부모에게 마시게 하고 3년 동안 선영의 곁에서 시묘살이를 해 ‘성품이 돈독하고 성실해 매사에 순일하고 방정하다’(『순조실록』)는 평가를 받던 선비였는데, 그도 광릉 참봉에 제수되자 나가지 않았다(『순조실록』 10년 12월 3일).

세조는 업보 탓이었는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전국의 온천을 찾아다녔다. 불교에 의지하기도 했다. 여러 일화가 전설처럼 전한다. 풍수에 능했던 세조가 자기 묻힐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 가난 탓에 아주 흉한 땅에 아비를 묻는 사람을 보고선 근처에 있는 길지로 이장하게 하고 비용 300냥도 대줬다. 묏자리를 잡아줬다는 지관을 산속 오두막으로 찾아가 흉지를 점지한 연유를 물으니 “사는 꼴이 너무 궁색한지라 당장 300냥을 벌 자리를 잡아주었소”라고 답했다. 감탄한 세조가 물었다. “그런 용한 지관이 왜 이리 옹색하게 살고 있는가?” 기다렸다는 듯 지관이 절을 하며 말했다. “국왕이 찾아올 땅이라 이렇게 기다렸나이다.” 세조가 그 지관에게 명하여 자기 묻힐 자리를 찾게 하니 그곳이 광릉이었다(남양주디지털문화대전).

조선 사회 정신의 축을 허물어트린, 오점 많은 세조의 능이 무성한 수목으로 덮인 모습을 보며 구보는 편견 없는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광릉숲은 ‘시간이 그린 자연의 그림’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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