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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으나 머물 수 없었던…도원의 초상, 끝내 닿지 못한 세계

맹수열

입력 2026. 04. 02   16:01
업데이트 2026. 04. 0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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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곁에, 예술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16 몽유도원도

안견이 그린 안평대군 꿈 속 이상향
굽이굽이 산등성이 너머 벼랑길 지나
색색이 복숭아꽃 평원 가득 흐드러져
안평이 남긴 발문 눈앞에 펼쳐지는 듯
‘계유정난’으로 아들과 함께 사사
비극적 운명 모르는 듯 평안한 꿈

몽유도원도에 적힌 안평대군의 발문.
몽유도원도에 적힌 안평대군의 발문.


왕은 강을 건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우리는 단종(端宗·1441~1457)과 그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수백 년 전 역사 속을 다시 걸어보았다. 영화에서는 엄흥도(1404~1474)와 단종 복위 운동에 앞장선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금성대군 이유(李瑜·1426~1457)가 등장한다.

영화의 시점에서 시간을 4년 전으로 이동해 보자.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왕위를 노렸다. 수양대군은 김종서(金宗瑞·1383~1458)를 비롯한 반대 세력을 거침없이 베고 그 식솔을 정변에 참여한 공신들에게 노비로 나눠줬다. 세조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자 친동생, 세종 후반기 찬란했던 문예의 중심축이었던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과 그의 열여섯 살 아들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문예계를 주름잡던 대군에서 역적으로의 신분 변화는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진귀한 서화가 가득하고 시회(詩會)가 열리던 안평대군의 공간 비해당(匪懈堂)과 무계정사(武溪精舍)는 파괴됐다. 마포에 있던 담담정(淡淡亭)은 안평대군과 절친했음에도 수양대군의 편에 섰던 신숙주에게 하사됐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거처와 측근 이현로(李賢老·?~1453)의 집에서 안평대군이 모았던 수많은 서화와 기록을 모조리 불태웠다. 안평대군이 쓴 아버지 세종대왕 영릉의 묘비문도 문질러 없애버렸다. 즉위 직후엔 안평대군의 글씨를 본으로 삼아 주조한 동활자 경오자(庚午字)를 녹인 뒤 다시 을해자로 만드는 등 왕실에서 그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버렸다.

이런 가운데 다행히 참화를 피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몽유도원도’다. 도화서 화원 안견(安堅)의 그림과 안평대군이 그림을 보고 지은 글과 글씨, 이를 감상한 스물한 명의 글이 함께 있는 이 두루마리는 세종 당시 찬란했던 문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박팽년(1417~1456),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이개(1417~1456), 정인지(1396~1478), 최항(1409~1474), 서거정(1420~1488), 박연(1378~1458)과 같은 집현전을 대표하는 학자와 김종서 같은 고관의 글도 함께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권축에 글을 남긴 박팽년과 이현로, 신숙주의 글을 봤을 때 ‘몽유도원도’의 원래 이름은 ‘몽도원도(夢桃園圖)’였을 것이다. 글을 남겼던 인물들이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한 치 앞을 몰랐던 인생의 황금기에 충의와 변절, 의리와 배신이 있을 거라는 복선이 작품에 깔려 있어 인간사의 여러 측면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몽유도원도’는 수십 년이 지난 뒤 어숙권(魚叔權)이 『패관잡기』에서 어느 고관의 집에서 그림을 봤다는 기록을 남긴 이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백 년이 흐르고 조선이 망한 후 1931년 일본 도쿄부립미술관에서 조선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됐다. 안타깝게도 당시 우리 수장가 손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나라(奈良)의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작품은 안평대군과 여기에 발문을 썼던 몇몇 인물의 비극적인 죽음을 미처 알지 못하는 듯 고요하고 평안하다. 스물아홉의 안평대군은 1447년(丁卯年) 음력 4월 20일 밤에 꾸었던 꿈을 도화서 화원인 안견에게 그리라고 했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해 바쳤다.

그림은 왼편부터 얕은 산과 시내로 시작한다. 굽이굽이 이어진 험준한 산등성이 너머로 벼랑길이 보인다. 길을 따라가다 거친 물길의 협곡을 건너고 산을 올라 폭포를 마주하고 선다. 다시 길을 재촉해 오르면 흰색과 자줏빛 복숭아꽃이 가득 핀 너른 평원을 마주한다. 복숭아나무가 가득한 들판에는 운무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산 끝 깊숙한 곳에는 짚으로 이은 지붕이지만 위엄을 갖춘 집이 자리 잡았다. 마치 집 앞 난간에 서면 저 아래 세상을 내려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대 명성이 자자했던 안견의 그림은 안평대군의 꿈을 자신이 꾼 듯 그려냈다.

아침에 안견이 가지고 온 그림을 본 안평대군은 저녁 무렵 사저인 인왕산 기슭의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그림에 대한 제기(題記)를 남긴다. 자신이 가장 잘 쓰는 단정하고 우아한 송설체(松雪體) 429자로 이 그림을 그린 연유를 적었다.

정묘년 4월 20일 밤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을 꾸었다. 인수(仁?·박팽년의 호)와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니, 층층이 산부리가 우뚝 솟아나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험준하여 그윽하였다. (중략) 그 골짜기에 들어가니 마음이 넓게 트여 2, 3리쯤 될 듯하며 사방의 산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노을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새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면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인수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서까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라고 했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과 신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후략·번역은 안휘준의 2018년 논문을 참고함)

안평대군의 단정한 글씨를 하나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글 속에서 그림이 아지랑이 피듯 그려진다. 복숭아나무 너머의 집에 안평대군이 앉아 벗과 시회를 열고 서화를 즐기는 듯한 착각도 든다. 안견의 그림이 주는 감동도 있지만 글이 그림에 깃든 감명도 크다. 뜻이 제대로 통하는 글과 그림은 사람들을 무한한 상상으로 이끈다. 은자(隱者)가 되고 싶었던 안평대군과 그의 거처 무계정사·비해당은 여전히 그림 속에 살아 있는 듯하다. 그의 꿈은 이렇게 글과 그림에서 영원한 삶을 얻었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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