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정덕현의 페르소나

극한 상황에서 터지는 매력... 재난극복도 재능이다

입력 2026. 04. 01   16:20
업데이트 2026. 04. 01   17:01
0 댓글

정덕현의 페르소나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으로 돌아온 하정우의 시대적 페르소나

절박한 생존 본능·처절한 인간적 고뇌 표정만으로 표현하는 ‘재난 전문배우’ 
비현실적 상황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생활 밀착형 연기에 시청자들 열광
영끌한 ‘이름만 건물주’ 위태로운 역할, 경제적 고통 시달리는 소시민 공감대

tvN 토·일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에서 기수종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tvN 토·일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에서 기수종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하정우만큼 재난을 잘 표현하는 배우가 있을까. 그는 폭탄이 설치된 방송국 스튜디오(영화 ‘더 테러 라이브’), 무너진 터널(‘터널’), 군사분계선 지하 30m의 비밀벙커(‘PMC: 더 벙커’), 테러범에게 납치된 비행기(‘하이재킹’) 같은 폐쇄된 공간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음으로써 빛나는 연기적 성취를 일궈 왔다. 그에게 ‘재난 전문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그저 재난영화에 많이 출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내는 특유의 생존 본능과 인간적 고뇌 같은 것을 그만큼 시시각각 변화하는 얼굴 표정만으로 표현하는 배우가 드물어서다. 그런 그가 이번엔 ‘경제적 재난’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tvN 토·일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 그 작품이다.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의 기수종(하정우 분)은 서울 토박이 가장으로 재개발 한 방을 노리며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세윤빌딩을 샀다. 하지만 치솟는 이자와 글로벌 자본의 유입으로 건물이 대부업체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그에게 닥친 재난은 눈에 보이는 건물의 붕괴가 아니라 ‘신용 붕괴’와 ‘잔고 고갈’이다. 그는 연체 고지서와 빚 독촉에 시달리며 건물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막힌 변기를 직접 뚫어 주고 배달 아르바이트까지 전전한다. 그가 보여 주는 건 물리적 재난과 폐쇄공간에서의 사투보다 더 치열하고 숨 막히는 ‘경제적 고립’이라는 재난이다. 그는 결국 건물을 지키기 위해 친구인 민활성(김준한 분)이 제안한 가짜 납치극에까지 가담한다. 친구의 아내인 전이경(정수정 분)을 납치해 장모로부터 거액의 몸값을 뜯어내려는 이 무모한 계획은 기수종이 처한 경제적 절박함이 어떻게 인간의 도덕성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정우가 표현하는 기수종이란 문제적 인물이 독특한 건 그가 하는 일이 범죄이지만, 시청자가 그에게 몰입해 그 범죄가 드러나지 않길 바라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범죄까지 저지르게 됐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지극한 가족애가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한 축이다. 또 다른 한 축은 기수종 같은 서민을 범죄까지 저지를 정도로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더 지독한 자본과 권력의 카르텔이다. 재개발이라는 이슈로 떼돈을 벌려는 글로벌 자본과 그들과 결탁해 권력을 쥐려는 정치의 카르텔. 하정우가 표현해 낸 기수종이란 인물은 부조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적 재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파괴하는지를 보여 준다.

어찌 보면 블랙코미디가 가득한 부조리극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이 드라마에 하정우는 현실감을 부여한다. 작품을 연출한 임필성 감독이 말한 것처럼 하정우는 “비현실적 상황조차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에너지가 있는 배우”다. 드라마틱한 상황에서도 그는 ‘생활 밀착형 연기’와 ‘고밀도 서스펜스’를 결합시킨다. 그래서 이런 놀라운 사건이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건물에서 벌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하정우는 현재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소박한 꿈인 ‘안정적 노후’ ‘자녀 교육비’ 같은 것들이 ‘건물주 신화’ 등의 사회적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는 걸 자연스러운 연기로 담아낸다. 평범한 인물이 막연히 생각하는 건물주 신화가 허구라는 걸 드러내고, 그걸 만들기 위해선 어떤 괴물이 돼야 하는지를 그린다.

이처럼 재난이라는 소재가 그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하지만, 하정우를 그저 ‘재난 전문배우’라는 괄호 속에 가둘 순 없다. 그는 영화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비스티 보이즈’의 비열한 호스트, ‘황해’의 조선족, ‘의뢰인’의 변호사, ‘범죄와의 전쟁’의 조폭은 물론 ‘베를린’의 비밀요원과 ‘허삼관’의 아버지 등 무수히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그럼에도 ‘재난 전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한정된 공간에서 다채로운 감정을 끄집어내야 하는 난제를 그만큼 잘 풀어내는 배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표현하는 극한 상황의 인물들은 우리 사회의 ‘위험’을 대신 앓아 주는 대역배우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도처에 깔린 ‘위험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페르소나가 우리에게 던지는 울림이 큰 것도 바로 그 위험사회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서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터널이 무너지는 물리적 위험은 물론 삶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는 경제적 위험을 우리는 매일매일 겪고 있지 않은가. 대중이 하정우라는 페르소나에 빠져드는 건 그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버텨 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너무나 공감돼서다. 때로는 타인을 위해, 때로는 가족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재난 앞에서 하정우의 페르소나는 두 얼굴을 드러낸다. 하나가 의로운 영웅의 얼굴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소시민의 얼굴이다. 때로는 이 두 얼굴이 상황에 따라 변해 가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정우는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당신이라면 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선택은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럼에도 위급한 상황을 애써 버텨 내고, 타인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선택을 내리는 그의 인물들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위로와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하정우의 페르소나가 다음에는 어떤 극한의 공간에서 우리를 맞이할지 그의 끝없는 생존 투쟁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