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힙(hip)’한 일이 됐다. 생존을 위해 배우는 언어가 아닌 문화적 소양을 위한 언어로 한국어가 자리매김한 것이다. K팝 노랫말을 그대로 이해하고 싶어,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를 자막 없이 알고 싶어, 팬심을 적극 드러내고 싶어 한국어를 공부한다.
미국 현대언어학회 발표에 따르면 2013~2021년 사이 미 대학에서 대부분의 외국어 수강생은 감소한 반면 한국어 수강생은 57%나 증가하는 독보적인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오빠’ ‘힘내’ ‘눈치’ ‘정(情)’ 같은 단어들이 전 세계 젊은이의 입에 오르내린다.
언어를 새로 익힐 때 우리는 낱말부터 배운다. ‘사과’라는 말을 알아야 사과를 가리킬 수 있고, ‘미안하다’는 말을 알아야 사과를 할 수 있다. 말을 배운다는 것은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의 단위를 하나씩 손에 쥐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어휘는 그 세계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이자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인 조각이 된다.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휘를 확보하지 못한 사고는 형체 없는 안개와 같아 자신의 생각의 문을 열 수도 없고, 구체성을 갖기도 어렵다.
단순히 말을 ‘하는 것’과 상황에 맞는 어휘로 ‘제대로 구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감정 하나를 표현할 때도 “기분이 안 좋아”라고 뭉뚱그리는 사람과 ‘서럽다’ ‘허탈하다’ ‘씁쓸하다’ ‘실망스럽다’를 구분해 쓸 줄 아는 이는 자기 내면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깊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박 4일의 훈련을 받으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특정한 순간 스스로의 상태를 그저 “힘들다” 정도로 인식하고 만다면, 그는 이후 정체 모를 감정의 홍수에 압도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그 감각의 실체가 수면 부족 등으로 인한 육체적 불편함인지, 은연중 낙오를 걱정하는 불안함에서 오는 것인지를 자신의 언어로 구체적으로 한 번 더 짚어 낸다면, 다시 말해 감정을 명확하게 명명(labeling)하려 애쓴다면 그는 대처방식을 달리할 수 있다.
풍부한 어휘를 갖춘다는 건 사고를 적절히 표현하고 내가 포착한 현상을 정확히 설명해 낼 ‘개념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행위만으로도 뇌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심리학자 매슈 리버먼 교수는 fMRI(MRI 기술을 기반으로 뇌 활동에 따라 생기는 혈류·혈액 산소 수준 변화를 영상으로 측정하는 기능자기공명영상법)를 통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분노와 공포를 관장하는 뇌의 ‘편도체’ 활동이 줄고,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우측 전전두엽’이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감정을 언어로 포착하는 순간 그 감정은 막연한 위협이 아니라 처리 가능한 정보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어휘로 감정을 명명하면 그 감정은 통제될 여지가 커진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공적 말하기에서 어휘력은 곧 전투력이기도 하다. 막연해 보이는 현상을 구체적인 정보로 전환할 어휘력이 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장악할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정’과 ‘눈치’를 배우며 한국의 마음을 알아가듯이 우리 역시 어휘력을 점검하고 확장해 가야 한다. 외국어를 공부하듯이 모국어인 우리말 어휘 공부도 지속적으로 하자. 더 풍부한 어휘를 가진 사람이 더 넓은 감정의 지형도를 갖고, 그만큼 자신을 다스릴 가능성이 커진다. 어휘력 키우기,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조용한 훈련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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