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조선시대 무예 훈련장, 근대 스포츠 중심에서 패션·디자인·전시 메카로

입력 2026. 03. 26   16:45
업데이트 2026. 03. 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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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 곳
조선의 훈련원이었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울지하철 2호선과 4·5호선이 교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출구를 나서면 은빛 외계 구조물처럼 솟아오른 건물과 맞닥뜨린다. 2만4000여 장의 알루미늄 패널로 덮인 곡선 덩어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다. 

이 DDP에서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에 걸친 공간은 조선의 훈련원이 있었던 곳이다. 건국 초에 정도전이 훈련관(訓鍊觀)을 세웠고(『삼봉집』),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개칭했다. 병조와 함께 무관의 선발 시험인 무과를 주관하고, 군사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무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활쏘기와 창검술을 익히고, 말을 달리며 군사 기예를 갈고닦았다.

조선 후기에는 백동수가 기존의 무예지에 바탕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를 장졸의 훈련 교본으로 삼았다(『명고전집』). 봄가을에 조정이 훈련원에서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열고, 마지막 날에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줬다(『견한잡록』). 훈련도감은 3000명으로 구성했는데 병정 네 명으로 한 보(保)를 짜고 한 사람이 군역에 복무하면 세 사람은 영외에서 지내며 베나 쌀을 바치는 보인제를 시행했다(『경국대전』). 별기군도 구성했다. 별기군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자를 뽑아 무예별감으로 뒀다(『정조실록』 즉위년). 무예별감 가운데서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가장 승진이 빨랐다.

을지로6가 훈련원공원.
을지로6가 훈련원공원.


훈련원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이던 류성룡의 건의로 새 군사 조직인 훈련도감으로 재탄생한다. 훈련도감의 첫 번째 도제조는 류성룡이 맡았다. 군역 의무자를 모아 운영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상비군을 편성한 것이 핵심적인 변화였다. 

인조 때는 무과 출신 6500여 명 가운데 절반이 포수여서 ‘국출신(局出身)’이라는 별도 편제를 뒀는데 조직 내 최고 위상을 차지했다. 훈련도감은 이후 금위영, 어영청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도성 방위를 책임진 오군영(五軍營)의 핵심 군영으로 성장했다. 후대로 갈수록 본래 임무인 군사 훈련 외에 도성 방위, 국왕 호위 등 주요 임무를 병행했다. 본청은 현재의 신문로 일대에 있었지만 동서남북에 분영(分營)을 둬 도성 곳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남영(南營)은 남영동이라는 동명으로 남아 있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하도감(下都監)이었다. 17세기 중반 효종대에 처음 설치된 하도감은 훈련원 동쪽 옆, 옛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부지에 자리를 잡았다. 훈련도감은 14세 이상의 양민과 양반으로 조직해 평상시에는 군포를 바치고 조련 때와 유사시에는 군역을 치르는 속오군(束伍軍)을 뒀으나 숙종 이후 폐지됐다. 훈련도감은 지방에 둔전을 둬 병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해 군량을 마련했다(『국조보감』). 본영에도 군사들이 거주하며 밭을 갈았다. 훈련원 배추는 최상품 대접을 받았는데, ‘파초 같은 잎을 하고 있어 가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다산 정약용이 『다산시문집』에서 언급했다.

훈련원 당시의 연못, 우물, 건물지 유적.
훈련원 당시의 연못, 우물, 건물지 유적.


2008년 9월부터 시작된 동대문 일대 발굴 조사 때 드러난 하도감 터는 그 쓰임이 단순한 병영이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갑옷, 투구, 환도(環刀)를 비롯한 각종 무기와 순찰 도구, 그리고 대규모 철기 생산과 관련된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훈련도감에서 주조한 상평통보(常平通寶)도 이곳에서 발견됐고(동대문 역사전시관), 매몰돼 있던 치성과 이간수문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도감은 단지 군인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무기를 만들고, 훈련하고, 도성을 지키는 복합 군사 기지였다(문화재청). 구보는 동대문유구전시장에 남아 있는 훈련원 건물지에서 경사면 언덕에 3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하고 단마다 장방형 건물과 좌우 부속 건물을 지어 담장으로 에워쌌음을 본다. 

개항 이후 군사제도가 요동치면서 1881년(고종 18년)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가 창설됨에 따라 하도감은 역할이 축소됐고, 이듬해에 폐지됐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종실록』).

1925년 10월 15일 일제는 이곳을 스포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당시는 훈련원 터와 용산연병장, 장충단공원 정도가 대규모 스포츠 경기를 치를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연결하고 있던 서울성곽을 헐고, 성돌을 석재로 재활용해 경성운동장을 완공했다. 축구장 가운데에 서울 성벽이 있었다. 축구장 동쪽 야구장이 있던 곳이 훈련원 부속 하도감 자리였다. 을지로6가 군영 자리에는 근대식 공원인 훈련원공원을 세웠다.

경성운동장은 1924년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는 취지로 지어졌다. 조선에서 처음 세워진 근대식 종합운동장으로, 총면적 2만2700평(약 7만5000㎡), 총 수용인원 2만5900명이며 육상 트랙과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을 갖춘 당시 ‘동양 최대의 종합경기장’이었다(서울시 미디어허브).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꿔 대한민국 근현대 스포츠의 산실 역할을 도맡았다. 프로야구 창단 초기 서울 연고 팀들이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고, 수많은 축구 명승부가 이 잔디 위에서 펼쳐졌다. 1966년에는 야구장에 조명탑이 설치되면서 국내 최초의 야간 야구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운동장 주변으로 스포츠용품 상가가 들어서고 벼룩시장이 열리는 등 독특한 상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동대문 구장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 구장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잠실에 서울종합운동장이 새로 들어서자 서울운동장은 1985년 1월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주요 경기는 잠실로 옮겨갔고,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중소 경기와 연습 경기가 이어졌으나, 점차 존재감이 약해지면서 2008년 축구장과 야구장이 모두 철거됐다. 훈련원에서 경성운동장으로 바뀐 지 83년 만이었다. 

2007년에는 그 공간이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 대상으로 변모한다. ‘역사 문화와 디자인이 어우러진 관광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 ‘환유의 풍경’이 당선돼 건설에 들어갔고, 2014년 3월 21일 DDP가 개장했다. 이 공간은 현재 전시·패션·디자인·상업이 교차하는 복합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DDP에는 조명탑 두 기가 아직 서 있어 공간의 옛 기억을 붙잡는다. 조선의 군인들이 이곳에서 도성을 지키며 땀을 흘렸고, 일제는 성벽을 허물어 운동장을 세웠으며, 근현대 한국인들은 그 운동장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그 공간에는 새로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지난 시간을 기념한다. 사진=필자 제공

DDP에 남아 있는 옛 동대문야구장 조명탑 시설.
DDP에 남아 있는 옛 동대문야구장 조명탑 시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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