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그리스 로도스섬 중세도시 유적 - 성 요한 기사단의 신거점
예루살렘 원정길 병자 돌보던 기사단
이슬람 세력 공격에 불가피하게 무장
청빈·순결·복종 수도 서약 유지한 채
기동부대 역할하며 빈자에게 음식도…
성지서 쫓겨난 후 동지중해 섬에 안착
성채·항구·병원 결합 도시 형태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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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기사단은 중세 십자군 원정 중 명성이 높았지만, 이에 필적할 또 다른 기사단도 있었다. ‘로도스 기사단’ ‘구호 기사단’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성(聖) 요한 기사단(Hospitallers of St. John of Jerusalem)이다.
성 요한 기사단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시선을 지중해 동쪽 끝으로 옮겨야 한다. 오늘날 튀르키예의 바로 코앞에 버티고 있는 로도스섬의 주도(主道)인 로도스(Rhodes)다. 이곳은 세계사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거대한 동상이 서 있던 항구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거상(巨像)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지만 성 요한 기사단의 근거지 유적은 고스란히 남아 동지중해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그 덕분에 로도스 성벽과 구도심 전체는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 요한 기사단은 어떻게 해서 역사에 등장한 것일까? 도대체 이들은 왜 성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동지중해의 모퉁이 섬으로 가야만 했을까? 이들 역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탄생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1096년 십자군 원정에 불이 붙었지만 성지를 향해 진군하는 기사와 여타 무장 병력이라는 십자군의 외양은 전쟁의 단면에 불과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인파엔 성직자, 순례자, 상인, 빈민, 여성, 아이들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무수한 사람 속에서 발생하는 질병·부상, 기아는 전쟁만큼이나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 요한 기사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검을 든 전사가 아니라 병자와 순례자를 돌보는 일종의 ‘군의관’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성 요한 기사단의 기원은 1차 십자군 전쟁 이전인 11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중해 교역을 주도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아말피공국 상인들은 이슬람의 통치 아래 있던 예루살렘에 기독교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세례 요한(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삼은 이 병원은 성지 순례 도중 병들거나 부상당한 사람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1099년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병원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병원 책임자인 프로방스 출신인 제라르가 십자군 지도자들의 신망을 얻은 덕분에 병원은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다. 순례자 무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의료와 보호의 필요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1113년 교황으로부터 공식 수도회로 승인받은 이들 공동체는 ‘성 요한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교황 직속 종교단체가 됐다.
그런데 기사단이 계속해서 ‘치유하는 수도자’로만 머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성지는 결코 평온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 국가들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 공격에 노출돼 있었다. 불가피하게 12세기 중반 이래 성 요한 기사단도 점차 군사적 성격을 강화했다. 이는 기사단 자체의 선택이자 성지의 현실이 강요한 결과였다. 병원과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장력이 필요했다. 이로써 기사단은 수도(修道) 서약(청빈·순결·복종)을 유지한 채 기사의 역할을 행하는 독특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검과 방패를 들었지만 동시에 병자를 간호하고 빈자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기사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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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기사단은 템플 기사단과 함께 십자군 국가의 핵심 전력(戰力)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국경 요새를 관리하고 기동 부대로서 전투에 투입되거나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수시로 변하는 십자군 전쟁의 정세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187년 이슬람의 영걸(英傑)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십자군 세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기사단 역시 예루살렘의 터전을 잃고 해안 도시 아크레(Acre)로 이동했다. 이후 이어진 수차례 공방전 속에서 1291년 십자군 최후의 거점인 이곳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이제 성지 전역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기사단도 더는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성 요한 기사단의 생존 전략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성지를 잃은 기사단은 키프로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1309년 로도스섬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는 기사단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육상 성지 방어에서 물러난 기사단은 이제 해양 세력으로 변신을 꾀했다. 점차 성 요한 기사단보다는 ‘로도스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된 이들은 이후 약 200년 동안이나 이슬람 해적과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주로 해상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에게해와 동지중해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서 기사단은 이슬람 세력의 해상 팽창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전초기지로서 기능한 셈이다. 이후 이슬람 군대의 끊임없는 침략에 맞서면서 기사단은 로도스섬에 성채와 항구, 그리고 병원을 결합한 독특한 도시 공간을 창출했다. 로도스 구도심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도스 시기의 성 요한 기사단이 남긴 가장 인상적인 유산은 단연 전체 길이 약 4㎞, 평균 높이 4m로 도시 전체를 감싼 성벽 체계와 도시 요새화 흔적이다. 로도스 구도심은 단일 성곽이 아니라 여러 겹의 방어선을 갖춘 복합 요새였다. 기사단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전문기술자를 초빙해 대포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최신 축성 기술을 적용했다. 성벽은 두껍고 낮게 쌓았고, 둥근 포탑과 경사진 성벽은 포탄의 충격을 분산시키도록 설계했다. 특히 성벽의 각 구간 축성 책임을 ‘랑그(langue)’별로 배정한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랑그는 프랑스·이탈리아·독일·스페인 등 언어와 출신 지역별로 기사단 구성원을 구분한 것이다. 각 성벽 구간의 명칭은 바로 이러한 기사단 구성원의 독특성과 조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성벽 안쪽으로는 기사단의 권력과 기능이 집약된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기사단장 궁전이다. 군사 지휘소이자 외교 공간인 이곳은 기사단의 상징이자 기사단 활동을 통솔한 두뇌였다. 궁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공방전이 벌어질 시 최후의 방어 거점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됐다. 두꺼운 벽과 제한된 출입구, 내부 안뜰 구조는 방어와 통제를 동시에 고려한 모양새였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시설은 바로 기사단 병원이었다. 이들은 로도스에서도 병원 기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기사단이 계속해 ‘치유하는 수도회’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성 요한 기사단의 역사는 단순한 군사 조직의 흥망사가 아니다. 비록 이들은 검을 들었지만, 동시에 사람의 상처를 치료했다.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고 성채를 건설했지만 언제나 원래의 사명인 병원을 중심에 뒀다. 로도스섬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쟁이란 파괴와 죽음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생명의 회복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는 참으로 ‘미스터리한’ 인간집단의 불협화음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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