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연극 ‘리타 길들이기’
2명이면 충분하다.
연극판을 들여다보면 유독 눈에 띄는 형식이 있다. 바로 2인극이다. 당장 대학로만 휙 돌아봐도 2인극 하는 공연장을 중국집에서 짬뽕 주문한 테이블만큼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2인극만 따로 모은 연극축제도 열린다.
왜 이렇게 2인극이 많은 걸까. 일단 가성비가 좋다. 배우 둘만으로도 이야기를 알차게 끌고 갈 수 있다.
2인극의 힘은 의외로 비워 낸 데서 나온다. 무대 위 인물이 적으니 관객의 눈이 다른 데로 샐 틈이 없다. 그래서 말 한마디, 숨 한 번, 눈길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배우에게는 숨을 곳이 없는 시험대이고, 관객에게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입구다.
2인극은 종종 배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장르로도 불린다. 장치도, 군무도, 화려한 전환도 없다. 무대란 이름의 식탁에는 오로지 말과 인물 관계만 오른다. 이 단출함은 독이 될 수도 있고,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잘 맞물리면 시계 톱니처럼 정교하게 돌아가지만, 어긋나면 바로 삐걱거린다. 2인극은 적게 보여 주고 많이 설득해야 한다. 쉽지 않다.
연극 ‘리타 길들이기’는 이런 2인극의 교본처럼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윌리 러셀의 희곡으로, 1980년 초연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 꾸준히 사랑받아 왔다. 이야기 자체는 간략하다. 수다쟁이 미용사 리타가 뒤늦게 대학에 입학해 영문학 교수 프랭크에게 수업을 받는다. “나, 바뀌고 싶어요. 뭐든 배우고 싶어요”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끌고 간다. 배움으로 자신을 바꾸려는 리타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프랭크.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조금씩 달라진다. 사실 그 변화가 이 작품의 전부다.
‘리타 길들이기’는 왜 ‘2인극의 교과서’로 불릴까.
첫째, 대사 중심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세상을 뒤집을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고, 벌어질 일도 없어 보인다. 무대 역시 프랭크의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극은 오로지 두 사람의 대화로만 진행된다. 말이 곧 사건이다. 리타가 던지면 프랭크가 받아친다. 대사 한 줄 한 줄이 관계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무대장치가 아니라 말 자체가 엔진으로 작동한다. 연극이 언어의 예술이란 사실을 이렇게까지 정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도 드물다.
둘째, 관계가 계속 움직인다. 시작은 교수와 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더니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거리를 뒀다가 다시 만난다. 이 변화는 물결처럼 서서히 밀려오고 종이 위에 쏟은 잉크처럼 번져 간다. 관객은 두 사람의 위치가 뒤집히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리타는 점점 자신의 언어를 얻게 되고, 프랭크의 세계는 금이 간다. 관객은 어느 순간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지 헷갈리게 된다. 이 묘한 뒤바뀜이 작품의 핵심이자 재미다.
셋째, 배우를 숨지 못하게 만든다. 등장인물이 달랑 둘뿐이어서 대사의 밀고 당김, 표정과 시선의 흔들림까지 전부 드러난다. 침묵마저 크게 들린다. 이 작품은 배우에게 일종의 ‘실기시험’처럼 여겨진다. 세계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이 작품에 도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대를 채우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너무 당연해 잊고 지냈던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
대학로 아트하우스에서 공연 중인 이번 시즌의 또 다른 재미는 캐스팅이다. 리타 역에 조혜련, 최여진, 유인이 번갈아 오른다. 프랭크는 중견의 남명렬, 류태호, 김명수다. 트리플 캐스팅은 당연히 3인 3색을 내기 위한 것이지만, 이번엔 좀 더 도드라져 보인다. 특히 리타는 세 배우가 한 역할을 나눠 맡은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세계의 리타를 보여 주는 듯하다. 3명의 리타가 이른바 리타의 평행우주를 나란히 달리고 있다.
최여진의 리타는 ‘좀 놀아 본 언니’ 같은 생동감이 좋았다. 등장부터 에너지가 확 튀어 오른다. 수다스럽고 거침없다. 대사가 워낙 많다 보니 간혹 놓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마저 캐릭터 안에서 자연스럽게 굴러간다.
유인의 ‘리타’는 궁금하다. 또 하나의 2인극인 ‘뷰티풀 라이프’에서 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다. 10대부터 노년까지 ‘박순옥’의 인생을 펜으로 그린 수채화처럼 세밀하게 펼쳐 보였다. 그 연기적 감성으로 만들어 낸 리타는 어떤 인물일까. 최여진 ‘리타’와 류태호 ‘프랭크’ 캐스팅으로 관람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유인 ‘리타’와 김명수 ‘프랭크’ 조합도 경험해 보고 싶다.
관객의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암전이 된다. 그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악장 사이에 박수가 나오는 느낌과 닮았다. 처음엔 조금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배우들도 힘이 났을 것이다.
연극 ‘리타 길들이기’를 즐기고 나오면 제목이 다르게 보인다. 프랭크는 과연 리타를 길들였는가. 오히려 리타로 하여금 자신을 길들이게 만든 것은 아닌가. 결국 누가 누구를 길들였는지 쉽게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더 확실해진다. 누가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인류가 반복해 온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 용기인가. 이 작품은 결국 사람이 성장하고, 변해 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2인극의 첫사랑 상대로도 최고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