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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가 심은 독재… 중동 전쟁으로 돌아오다

입력 2026. 03. 20   15:58
업데이트 2026. 03. 2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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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아르고(2012)

감독: 벤 애플렉
출연: 벤 애플렉(토니 멘데즈), 브라이언 크랜스턴(잭 오도넬), 앨런 아킨(레스터 시겔), 존 굿맨(존 체임버스), 빅터 가버(켄 테일러)

1979년 11월 4일, 이란 혁명 세력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기 직전의 모습. 이날 시작된 444일간의 인질 사태는 1953년 CIA가 이란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에 대한 26년 만의 청구서였다. 사진=워너브러더스
1979년 11월 4일, 이란 혁명 세력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기 직전의 모습. 이날 시작된 444일간의 인질 사태는 1953년 CIA가 이란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에 대한 26년 만의 청구서였다. 사진=워너브러더스

 

“무엇보다도 로마 공화국은 후대 공화국 시민들에게 정치 방해 공작에 눈감고 정치 폭력을 끌어들일 때 따라오는 엄청난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로마 역사는 정치인들이 체제를 좀먹는 행동을 할 때 시민들이 이를 외면하면 그들의 공화국이 치명적인 위험에 처한다는 현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줬다.” 『독재의 탄생』, 에드워드 와츠 지음, 마르코폴로 펴냄

CIA와 할리우드의 은밀한 동거
아르고 작전의 핵심은 영화가 완벽한 위장막이 될 수 있다는 CIA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었다. CIA와 할리우드의 밀월은 냉전 시대부터 시작됐고, 아르고는 그 관계의 결정판이었다. CIA는 자신들의 가장 성공적인 작전을 영화로 만드는 데 적극 협력했다. 벤 애플렉은 CIA 본부 내부에서 촬영을 허가받은 최초의 감독이 됐다. 영화 속에서 CIA는 위기를 해결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1953년 쿠데타로 이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그 대가로 1979년 인질 사태를 불러온 역사는 영화의 서두에 짧게 언급될 뿐이다. 

할리우드가 CIA의 완벽한 위장막이자 효과적인 홍보 도구로 전락한 충격적인 사례는 애니메이션 ‘동물농장’(1954)이었다. 조지 오웰의 원작은 전체주의와 함께 자본주의도 비판하는 작품. 그러나 CIA는 비밀리에 판권을 사들이고 제작비를 지원하면서 결말을 바꿔버렸다. 원작에서 돼지와 인간이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영화는 동물들이 돼지(공산주의자)를 타도하며 끝나는 반소련 선전물이 됐다. 오웰이 살아 있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제로 다크 서티’(2012)도 노골적인 사례 중 하나. CIA가 고문을 통해 빈 라덴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CIA가 기밀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사실상 서사를 설계했다. 그러나 이후 미 상원 조사에서 CIA의 고문은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영화는 고문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됐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 ‘지옥의 묵시록’(1979)은 CIA의 미군 장교 암살을 암시하는 내용 때문에 지원을 거부했다. 독자 촬영하는 바람에 제작비가 폭증했고, 감독은 집까지 담보로 맡기며 영화를 찍었다.

독재를 심은 자, 혁명을 거둔다
“있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다.” 철학자 세네카의 서늘한 사상은 로마 공화정에만 해당하는 경고가 아니었다. 시간을 돌려보자. 1953년 8월, 이란 테헤란 거리에서 역사는 조용히,그러나 결정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란 최초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쿠데타로 축출된 것. 배후는 영국 MI6와 미국 CIA였다. 작전명 ‘TPAJAX’. 이란의 석유를 국유화하려 했던 모사데크가 서방의 석유 이권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로 복위한 팔라비 국왕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26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정부 인사를 고문하고 투옥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오랫동안 철권 독재정치를 해오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정권은 민중 봉기에 의해 무너졌다. 1979년 1월,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이 치료를 이유로 팔라비의 망명을 허용하자 이란 국민의 분노는 다시 끓어올랐다. 11월 4일, 결국 분노한 이란인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 52명의 외교관이 인질로 붙잡히며 444일간의 인질 사태가 시작됐다. CIA가 1953년 심은 독재의 씨앗이 26년 만에 거대한 반미 혁명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오늘까지 끝나지 않았다. 2024년 4월,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드론과 미사일 300여 기를 발사했다. 중동 역사상 이란이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스라엘도 반격했다. 결국 2026년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1953년 CIA가 이란의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독재를 심었을 때, 70년 후 중동 전쟁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에드워드 와츠가 로마 공화정을 통해 경고한 것처럼 정치적 폭력을 묵인하고 독재를 용인할 때 그 대가는 반드시, 그리고 훨씬 크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영화 ‘아르고’에서 CIA 요원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가 여섯 명의 외교관을 이끌고 테헤란 공항을 빠져나가는 장면. 1980년 1월 28일 실제로 벌어진 탈출 작전을 재현했다. 사진=워너브러더스
영화 ‘아르고’에서 CIA 요원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가 여섯 명의 외교관을 이끌고 테헤란 공항을 빠져나가는 장면. 1980년 1월 28일 실제로 벌어진 탈출 작전을 재현했다. 사진=워너브러더스


가장 황당한 작전이 가장 완벽했다 
영화 ‘아르고’는 1979년 미국 대사관 점거 장면으로 시작한다. 군중이 담을 넘고, 외교관들은 기밀문서를 서둘러 파쇄한다. 혼란 속에서 여섯 명의 외교관이 뒷문으로 빠져나가 캐나다 대사 켄 테일러(빅터 가버)의 관저에 몸을 숨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1953년 쿠데타부터 팔라비 독재, 이슬람 혁명까지의 역사를 간결하게 설명하며 이란 민중의 분노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먼저 보여준다. 

워싱턴의 CIA 본부에서 구출 전문요원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는 황당한 아이디어를 들고 나타난다. 가짜 SF 영화 ‘아르고’를 제작하는 척하며 여섯 명을 캐나다인 영화 제작팀으로 위장해 빼내겠다는 것. 상관 잭 오도넬(브라이언 크랜스턴)은 한마디로 정리한다. “엉터리 영화가 최선의 작전이라고?”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다.

멘데즈는 할리우드로 가서 아카데미 분장상 수상자 존 체임버스(존 굿맨), 한물간 제작자 레스터 시겔(앨런 아킨)과 손을 잡는다. 가짜 영화사를 차리고, 대본을 만들고, 기자회견까지 연다. “좋은 거짓말을 만들려면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 시겔의 이 말이 작전 전체를 관통한다.

한편 캐나다 대사 관저에 숨어 있는 여섯 명은 극도의 불안 속에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파쇄된 대사관 문서를 한 조각씩 맞추며 탈출자를 추적하고 있다. 그들은 이름도, 직업도, 삶의 이력도 모두 바꾸고 갑자기 캐나다인 영화 제작팀이 돼 각자의 가짜 배역을 외워야 한다. 언제 혁명수비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벼락치기 배우 훈련이다. 1980년 1월 28일 새벽, 멘데즈와 여섯 명은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으로 향한다. 출국 심사대 앞에서 경비대원이 스토리보드를 들여다보고, 여권을 확인하고, 무전기가 삑삑 울리는 동안 탑승구에서는 비행기가 출발을 기다린다. 영화는 이 장면에 극적인 긴장감을 모두 집어넣는다. 비행기가 이란 영공을 벗어나는 순간, 기내에 환호가 터진다. 관객도 함께 숨을 내쉰다.

멘데즈는 작전 직후 훈장을 받았지만 기밀 작전 특성상 CIA가 보관했고, 1997년 기밀이 해제된 후에야 자신의 훈장을 돌려받았다. 영화는 토니 멘데즈의 회고록 『위장의 달인』과 조슈아 베어만이 쓴 2007년 기사 ‘위대한 탈출: CIA가 가짜 SF영화를 이용해 테헤란에서 미국인들을 구출한 방법’을 바탕으로 한다. 살벌한 인질 사태 중 이란에서 우주 오페라를 촬영하고 있다는 걸 누가 믿었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거의 모든 이란 사람이 믿었다(할리우드 만세!). 가짜 영화에 대한 진짜 영화인 ‘아르고’는 2013년 아카데미 작품상·편집상·각색상을 받았다.

<br>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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