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시간의 건축

입력 2026. 03. 19   15:30
업데이트 2026. 03. 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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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오랫동안 방치된 절터를 ‘사지(寺址)’라고 한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흥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가 불교를 누르던 이른바 숭유억불 정책이 펼쳐졌다. 많은 절이 폐사됐다. 절도, 스님도, 신도도 다 사라지고 절터만 남았다. 감은사지, 황룡사지, 월남사지 등등.

한때 사람들의 손길로 번들거렸을 목조 건물은 다 사라지고 휑한 절터에는 돌로 만든 탑, 당간지주가 남아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있다. 걷다 보면 절 지붕을 덮었을 기왓장이 파편으로 남아 소리를 내며 밟힌다. 사자후로 설법하던 스님과 이를 들으며 원근에서 몰려든 신도들이 야단법석을 이루던 자리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다. 절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 사라졌다. 그 자리를 침묵이 채우고 있다.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다. 사람들은 이 쓸쓸함을 견디지 못한다. 휴대전화, 텔레비전 등의 기기를 통해 외부로부터 자극이 멈추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쓸쓸함은, 나쁜 그 무엇이다. 뭔가를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지방자치단체는 그 쓸쓸함을 더욱 견디지 못한다. 지자체가, 혹은 중앙정부가 주도해 황량한 절터를 정비하고 새롭게 대웅전을 짓고는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에 대견하고 뿌듯해한다. 어수선한 절터를 정비하는 것까지는 좋다. 침묵만이 채우고 있던 공간은 반짝반짝 빛나는 새 대웅전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이 마음먹으면 1년 만에도 큰 대웅전을 세울 수 있다. 요즘은 기계와 장비가 좋아져 더 쉽게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급히 세운 건물로 인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어떤 건축이다. 그건 1000년 이상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사지의 텅 빈 공간을 적요함으로 채우고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의 건축’이다.

시간의 건축이 사라지고 새 건축이 들어선 자리는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고 생경한 풍경에서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시간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과 사람이 세울 수 있는 건축과 시간이 세울 수 있는 건축이 따로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시간의 건축, 말 그대로 시간이 만든 건축이다. 하나의 건축이 들어서면 그 건축을 완성해 나가는 건 그 건축을 꾸준하게 드나드는 사람들, 즉 사용자들 몫이다. 신심이 가득한 스님과 불자들이 절이라는 건축물을 완성한다. 그들이 사라지면 아쉬움의 시간이 흐른다. 절은 점점 황폐해진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기와지붕에 풀이 자라기 시작한다. 썩어 버린 대들보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다. 스님의 법문, 불경을 외우는 소리 대신 어디선가 날아온 뻐꾸기가 울음소리를 낸다.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도 건축의 한 행위이지만 건축물이 사라지는 것도 그 행위의 연속이다. 건축물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은 시간이 채워 나간다. 1년, 2년, 드디어 1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100년을 살지 못한다. 1000년의 시간은 인간의 실존적 감각을 초월한다. 그러니 1000년의 시간이 만들 수 있는 건축은 어떤 천재 건축가도 설계하고 시공할 수 없다. 시간은 오직 시간만이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건축가의 건축은 훌륭하다. 그러나 시간의 건축은 위대하다. 시간의 건축이 완성되려면 1000년을 견뎌 내야 한다. 100년을 못 사는 인간이 가렸던 시시비비는 1000년의 세월 앞에선 허망하다. 시간이 우리에게 베푸는 큰 가르침은 옛 절을 지켰던 스님의 지혜와 공력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시간의 건축을 허물고 굳이 어중간한 사람의 건축을 따로 세울 필요는 없다.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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