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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같은 일상에 '쉼표' 아름다운 엇박자

입력 2026. 03. 19   16:57
업데이트 2026. 03. 1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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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문학-두 도시 이야기
스위스 취리히와 대만 타이중 上

도시 절반이 숲과 녹지…강과 호수 ‘천연 수영장’ 곳곳에
넥타이 풀어놓고 헤엄치다 햇볕에 몸 말리고 다시 일터로…
느슨한 듯 보이지만 한 치 오차 없는 시간표·약속된 루틴
밤 10시는 ‘잠자는 시간’ 사회적 합의…밤의 고요함 누려
자연과 신뢰…‘두 기둥’ 위의 공동체 완벽한 균형점 찾아

 

스위스 취리히와 대만 타이중은 일상과 자연이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다. 취리히는 도시 면적의 절반가량이 숲과 녹지로 이뤄져 있다. 알프스의 빙하수와 숲을 곁에 둔 시민들은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누린다. 대만 최고봉인 옥산(3952m), 해와 달을 품은 일월담 등 웅장한 자연을 가까이 둔 타이중 역시 마찬가지다. 두 도시는 주말의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들였다는 놀라운 공통점을 지닌다.

 

페리를 기다리며 한갓진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 취리히에서 대중교통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자연과 일상을 연결하는 통로다. 필자 제공
페리를 기다리며 한갓진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 취리히에서 대중교통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자연과 일상을 연결하는 통로다. 필자 제공


도심 속 명상공간 

머물수록 감탄을 금치 못한 도시가 있다면 취리히다. 비싼 물가와 풍부한 예술과 문화, 독일어·프랑스어·영어 등 다국어에 능통한 현지인까지 어느 하나 익숙해질 틈 없이 매 순간 인상을 새로 고쳐 쓰게 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장면은 강과 호수를 즐기는 이들의 생활방식이었다. 리마트강과 취리히호수 주변 산책로는 조깅이나 수영, 산책을 즐기는 시민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도착한 늦여름의 호숫가 풍경은 ‘전 세계 삶의 질’ 순위에서 늘 최상위권을 지키는 취리히를 단번에 이해시켜 주는 장면이었다.

취리히는 도시 면적의 40% 이상이 숲과 녹지로 이뤄져 있다. 알프스 빙하가 녹아 형성된 깨끗한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도시 곳곳에 설치된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아이들, 주말마다 숲으로 향하는 가족의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취리히에서 한 달을 머무는 동안 이런 풍경을 자주 마주했다.

취리히 사람들의 일상 가까이에는 늘 자연이 있다. 강과 호수를 활용하는 천연 수영장이 11여 곳이나 된다. 여름이면 넥타이를 맨 직장인이 점심시간을 이용, 강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햇볕에 몸을 말린 뒤 사무실로 복귀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퇴근 후에는 호숫가에서 노을을 감상하며 맥주를 마신다. 이들에게 강과 호수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고 자유를 만끽하는 해방구다.

취리히가 주는 일상의 평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도심에서 트램이나 버스로 15~20분만 이동하면 숲이 나온다. 취리히 사람들에게 숲은 나뭇잎·새소리를 들으며 도시 속 명상을 즐기는 치유공간이다. 숲을 걷는 것은 취리히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자연이 멀리 있는 휴양지가 아니라 퇴근길에 잠시 들르는 산책로인 셈이다.

 

 

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한 프라우뮌스터.
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한 프라우뮌스터.

 

세계 최고의 금융도시

느긋하고 평화로운 취리히는 사실 세계 최고의 금융도시다. 약 2000년 전 로마시대 린덴호프언덕에 세운 투리쿰세관에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투리쿰은 정착지이자 세관으로 리마트강과 취리히호수 사이 무역로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중요한 통문 역할을 했다. 우리에게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배경으로 익숙한 장소다. 린덴호프언덕은 리마트강과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오늘날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언덕에 올라 강변 난간에 앉으면 취리히를 상징하는 하늘색 트램이 강을 따라 달리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트램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두 개의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청록색 첨탑의 프라우뮌스터는 마르크 샤갈이 제작한 5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하다. 강렬한 햇살이나 오후의 은은한 빛 아래서 이 창문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띤다. 반대편에는 쌍둥이 탑으로 유명한 그로스뮌스터가 있다. 이 교회는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발상지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가 1519년부터 이곳에서 목회하며 가톨릭 미사와 성상 숭배를 비판하고 성경 중심의 예배를 주장한 곳이다. 

그가 설교에서 강조한 근면과 절제는 오늘날 스위스 경제 번영의 정신적 뿌리가 됐다.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금욕적이고 근면한 개신교 사상이 결합하면서 스위스인은 엄청난 부를 이뤘지만, 이를 과시하지 않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돈이 많아도 화려한 명품 대신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고집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스위스 기차역마다 걸려 있는 빨간 동그라미 초침 시계. 한스 힐피커가 설계했다.
스위스 기차역마다 걸려 있는 빨간 동그라미 초침 시계. 한스 힐피커가 설계했다.


남다른 시간관념

취리히는 대중교통 이용이 특히 편리한 도시다. 노선망이 촘촘하고 배차 간격도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한 달 정액 패스만 있으면 도시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단 정액권 가격이 한국의 서너 배를 훌쩍 넘는 게 흠이다.

취리히를 이해하려면 스위스인의 시간관념을 먼저 살펴야 한다. 스위스는 정확성이 중요한 나라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게 철도 시스템이다. 취리히 중앙역은 하루에 2900편 이상의 열차가 오간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운행량이다. 정밀한 기계장치와 철저한 시간 관리가 이 복잡한 철도망을 움직인다.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시계산업과 철도 시스템이 서로 닿아 있다.

스위스의 모든 기차역에는 빨간 동그라미 초침으로 유명한 시계가 걸려 있다. 한때 아이폰에 비슷한 디자인을 적용해 특허분쟁을 일으켰던 바로 그 시계다. 취리히 출신 스위스 철도청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 한스 힐피커가 고안했다. 이 시계는 초침이 12시 방향에서 약 1.5초 멈춘 뒤 분침과 함께 움직이는 ‘스톱 투 고(Stop to Go)’ 메커니즘을 가졌다. 이는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기차가 정시에 출발하도록 돕는 고도의 기술적 장치다. 어떤 것도 대충 만들지 않는 스위스답게 시계 역시 세련된 디자인과 정교한 기술이 어우러진 하나의 작품이다.

취리히 사람들은 시간을 대충 보내지 않는다. 저녁식사 약속은 최소 한 달 전,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모임은 1년 전부터 잡는다. 가족과의 저녁식사, 반려견과의 산책, 화분에 물 주는 시간까지 모든 일상의 루틴이 정해져 있다. 루틴을 바꾸려면 고려할 게 많다는 걸 알기에 상대의 삶을 존중하며 즉흥 약속을 제안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 규약에도 스며 있다.


취리히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개인적이고도 자유로운 휴식을 즐긴다.
취리히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개인적이고도 자유로운 휴식을 즐긴다.


공동체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

스위스인은 공동체 규칙을 존중한다. 밤 10시 이후 화장실 사용을 자제하고 공용 세탁실은 정확히 예약된 시간에만 쓴다. 스위스에선 개인 세탁기보다 공용 세탁실을 이용한다.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숙소에 세탁기가 없어 세탁소를 찾아 헤맸다. 유럽에서 흔한 코인 세탁소조차 취리히에선 찾기 어려웠다. 나중에 현지인에게 세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숙소 지하실에 세탁기가 없냐?”며 놀라워했다.

공공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집에 세탁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높은 물가로 인해 주로 작은 집에 살기에 세탁기 놓을 공간이 부족하다. 세탁기 소음으로 다른 집에 피해를 줄 수도 있어서다. 대신 건물 지하의 세탁실을 공유한다. 여기에는 스위스 특유의 ‘질서’와 ‘예약문화’가 숨어 있다. 세탁기를 쓸 수 있는 요일과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다음 사용자를 위해 필터 먼지 하나까지 깨끗이 제거하는 게 기본 불문율이다. 마치 아무도 안 다녀간 것처럼 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밤 10시 이후는 잠자는 시간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그 시간을 넘기는 세탁을 금지하고 샤워도 피해야 한다. 한국인에겐 이해하기 힘들고 자유를 억압하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살아 보면 정반대다. 규칙과 질서 덕에 사람들은 자신의 루틴에 몰입할 수 있다. 밤 10시 이후 소음이 없으니 모두가 조용한 밤을 보낸다. 이런 규칙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밤의 고요함을 만들어 낸다.

취리히 시민의 이런 생활관념은 장을 볼 때도 이어진다. 스위스인은 ‘미그로’와 ‘쿱’이라는 두 협동조합 마트 중 하나와 평생을 함께한다. 부모가 어느 마트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은 ‘미그로 키즈’ 또는 ‘쿱 키즈’로 불린다. 한 번 맺은 조합과의 인연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은 스위스만의 독특한 문화다. 여행자인 우리는 미그로와 쿱, 두 곳을 모두 이용했지만 현지인은 대부분 평생 한 마트를 고수한다.

조합원만 의리를 지키는 게 아니다. 협동조합도 고객에게 보답한다. 1925년 취리히에서 탄생한 미그로는 수익만 좇지 않는다. 시민 건강을 위해 술과 담배를 절대 팔지 않는 전통을 고수한다. 벌어들인 수익의 일정 비율을 문화와 교육사업에 환원한다. 창업자 고틀리프 두트바일러의 ‘이익은 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철학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취리히 시민은 장을 보며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인인 공동체의 가치를 구매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공동체 정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보여 주는 사례다.


리마트강과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린덴호프언덕.
리마트강과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린덴호프언덕.


가장 인간다운 박자

취리히가 살기 좋은 이유는 도시 전체를 ‘신뢰’와 ‘자연’이라는 두 기둥 위에 설계했기 때문이다. 정시에 도착하는 대중교통, 호수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청결함, 엄격한 규칙 속에서 보장되는 개인 간 신뢰가 이를 잘 드러낸다. 질서와 신뢰가 만들어 낸 안정감이 개인에게 정신적 여유를 주고, 도시의 깨끗한 공기 덕분에 마음껏 자연을 누리고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다.

취리히는 세계적 금융허브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준 전 세계 최상위 도시다. 하지만 거리에서 화려한 슈퍼카나 명품 로고로 치장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이들이 말하는 삶의 여유는 부가 아니라 신뢰와 자연이다. 취리히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인 이유는 그곳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 자연과 문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완벽한 균형점을 찾아서다. 정밀한 시계태엽은 오늘도 자연의 흐름에 맞춰 가장 인간다운 박자로 움직인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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