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수
국방일보-국가유산청이 함께하는 ‘두 발로 만나는 국가유산’
빛나는 철기 국가유산-가야 문명의 길
한반도 남단서 무역 주도하다
신라에 복속된 잊혀진 왕국…
투박한 갑옷·투구에서
전투 나선 장수의 모습
용맹함과 함께
최고의 기술력 엿보다
철기문화 전성기 보여준 김해 ‘금관가야’
김해박물관에서 K무기체계 원조 직관
고령 ‘대가야’ 왕릉 모인 지산동 고분군
순장 등 고대 한반도 장례 풍습 확인
우리 역사 속에서 가야의 평가는 엇갈린다. 고대사회를 흔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로 부르는 관점에서 가야는 그저 주변 소국 연맹이자 중앙집권 실패로 잊힌 왕국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500여 년간 삼국과 경쟁·협력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한반도 남부에서 ‘철의 왕국’으로 번영했던 역사를 주목하는 시선에선 고대사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바라본다. 2026년 가야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까.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가야고분군을 중심으로 찬란했던 가야의 진면목을 확인해 본다. 글=노성수/사진=김태형 기자
국가유산 방문코스 ‘열 개의 길 일흔여섯 개의 만남’ 시작은 ‘가야 문명의 길’이다. 가야의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한 이곳은 고대 가야의 역사·문화를 보여 주는 7개 지역의 고분 유적으로 구성돼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받았다.
가야는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를 통합해 세운 연맹 왕국으로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등 여섯 국가가 있었다. 풍부한 자원으로 생산한 철을 매개로 다양한 육로와 해로를 거쳐 낙랑이나 중국·일본 및 한반도의 여러 지역과 교역했다.
가야 문명을 직접 마주하러 가는 길은 일정을 짜는 것부터 녹록지 않았다. 경남 김해부터 함안, 창녕, 고성을 거쳐 전북 남원, 경북 고령까지 가야 유적지가 워낙 방대해 이동거리를 계산하면 일정이 무척 빠듯했다. 결국 국가유산 방문코스 여권에 스탬프를 모두 찍겠다는 야심을 접고, 주요 코스를 중심으로 일정을 짰다.
먼저 서울에서 KTX로 부산에 도착해 공유 자동차를 빌려 김해로 향했다. 낙동강 하류에 있는 김해는 가야의 전기를 주도한 금관가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금관가야 왕들의 마지막 안식처 대성동 고분군을 찾기 전 국립김해박물관을 들렀다. 학창 시절 가야에 관해 배웠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데다 역사의 흐름을 익히기엔 박물관이 제격이다 싶었다.
조선경 홍보담당 주무관의 안내에 따라 박물관에 들어서니 가야의 흥망성쇠와 문화적 특징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우리를 맞았다.
동아시아 해상 교역망의 중요 거점이었던 가야는 다양한 외래 문물이 발견돼 당시 국제적 위상을 보여 준다. 중국 진나라의 청동 솥과 허리띠, 북방 선비족 계통의 말갖춤(말을 부리기 위해 만든 각종 장비), 일본계 청동 제품과 비취 경옥, 열대 조개 등이 이를 입증한다.
말갑옷과 고리자루큰칼, 미늘쇠 등의 철 제품에선 ‘철의 왕국’으로 위세를 떨쳤던 전성기를 짐작하게 했고, 화려한 신라의 금관과 달리 단순한 나뭇가지 모양의 금동관에선 가야만의 면모가 느껴졌다.
가야는 철이 풍부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기 좋은 곳이어서 주변국의 표적이 됐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가야의 수많은 전쟁 기록이 남아 있는데 자연스레 칼과 검, 창과 화살의 발달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손으로 만든 무기체계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방산’의 뿌리인 셈이다.
가야는 쇠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갑옷도 방어 기능이 뛰어나고 몸에 딱 맞게 최고의 기술로 만들었다. 새·고사리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한 갑옷과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로 무장한 뒤 용과 봉황 장식이 새겨진 큰 칼이나 긴 창을 들고 전투에 나선 가야 장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야에서는 말도 용맹한 전사였다. 박물관 한쪽에 전시된 말에 씌우는 갑옷과 투구, 장신구는 말을 타고 주변국들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음을 입증한다.
‘K무기체계’의 원조를 마주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엔 거대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거대한 흙더미는 100개 층으로 이뤄졌다. 다른 나라에서 온 토기, 뼈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970점, 점을 칠 때 쓰는 뼈 도구 101점, 동물 뼈 5065점, 조개껍데기 40종, 옥구슬과 철로 만든 물건, 석기 등이 발견돼 당시 생활 모습이나 교류했던 지역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의 쓰레기더미가 역사와 문화가 쌓이면서 국가유산으로 당당히 우리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봄 내음을 맡으며 걷다 보니 ‘김해 수로왕릉’이 위용을 드러냈다.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 수로왕의 무덤이다.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 가운데 처음으로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수로이며, 후에 금관가야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임에는 분명하다. 인근 구지봉에는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무덤인 ‘김해 수로왕비릉’도 자리해 있다. 허황옥은 16세의 나이에 아유타국(인도)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수로왕의 아내가 됐다고 전해진다. 허황옥이 어디서 왔는지는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우리 사회가 주목하는 ‘다문화’란 용어가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김해의 마지막 코스는 가야고분군 7개 중 가장 이른 시기 가야의 위상을 보여 주는 대표 유산인 대성동 고분군이었다. 이곳은 1990년부대부터 진행된 발굴 조사로 금관가야 왕들의 묘역이라는 게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지배층의 묘역과 피지배층의 묘역이 별도로 조성됐을 뿐만 아니라 시신 또는 화장한 뼈를 담아 묻는 토기인 독을 활용한 3단 독무덤이 최초로 출토돼 금관가야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벚꽃 꽃봉오리가 맺힌 대성동 고분군 주변을 여유롭게 산책하는 시민들을 보며 과거의 영광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가야의 모습이 교차했다.
가야 전기를 이끌었던 김해의 금관가야를 뒤로하고 가야의 최전성기를 주도하다가 마지막을 맞이한 대가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영남과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영역 국가로 존재감을 뽐냈다.
경북 남서쪽에 위치한 고령은 백두대간의 줄기인 가야산이 북쪽을 감싸고 낙동강이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외부 침입이 어렵고, 낙동강으로 쉽게 밖으로 통할 수 있어 대가야국으로 발전할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셈이다.
부산에서 동대구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뒤 다시 차를 빌려 고령으로 향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던가. 문화유산을 찾기 전 허기진 속을 달래려 전국에서 손꼽히는 ‘찹쌀떡 맛집’이라는 진미당부터 들렀다. 대가야읍 시장길에서 맛본 찹쌀떡은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심심한 단팥과 쫀득함이 어우러져 60년 전통의 맛을 느끼게 했다.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지산동 고분군 기슭으로 이동해 대가야박물관 역사관부터 찾았다. 이곳에는 520년간 지속된 대가야가 562년 9월 신라에 멸망하기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뒤편으로 이동하면 국내 유일의 순장 왕릉 전시관인 대가야박물관 왕릉전시관이 나온다.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최대 규모의 순장 왕릉인 지산동 44호 내부를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해 놨다. 관람객은 실물 크기로 복원된 왕릉 속으로 들어가 왕릉의 내부와 축조 방식, 왕과 순장자의 매장 모습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 함께 묻는 장례 풍습인 순장문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전시관을 나와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700여 기가 줄지어 있다. 가야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다. 높은 산자락에 서서 가상현실 속 이미지 같은 풍경을 마주하자 긴 탄성도 잠시, 복잡한 감정이 휘감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지만, 화려했던 가야의 영광은 어디로 갔을까. 역사에 무지한 우리가 가야의 저력을 몰라본 채 역사의 뒷길로 밀어낸 건 아닐까. ‘K컬처’가 전 세계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는 지금, 수천 년 전 가야가 남긴 문화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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