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Ⅲ

수만 명 희생 끝 독립 쟁취… 번영으로 이어가진 못해

입력 2026. 03. 16   15:41
업데이트 2026. 03. 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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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Ⅲ >>> 아프리카-케냐 ① 

1895년 영국 보호령…원주민들 노예로
1·2차 세계대전 땐 유럽 전장 강제 동원
청년들 전투 경험 훗날 독립투쟁 근간
무질서한 도심…빈곤·개발 극명한 대조
대중교통 퀵 오토바이 타고 불안한 질주
힘겹게 찾아간 독립운동 성지는 공사중


케냐는 동아프리카에 있다. 북서쪽으로는 에티오피아·남수단·우간다가, 남으로는 탄자니아, 동으로는 소말리아와 국경을 접하며 인도양을 끼고 있다. 케냐 수도는 500만 시민이 사는 대도시 나이로비다. 국토 면적은 한국의 5.8배인 약 58만㎢, 인구는 5500만 명에 이른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0달러 안팎이며, 아프리카 ‘사파리 관광’의 중심국이다.

아프리카를 누비는 조선족 청년
나이로비행 항공기 좌석은 만석이다. 수단, 영국, 독일, 중국, 에티오피아 등 각양각색의 국적자들로 부대낀다. 흔히 빈곤·기아·무질서로 인식되는 아프리카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역동적인 아프리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옆좌석 청년이 먼저 넙죽 인사한다. 베이징에 있는 대형 자동차 회사 영업사원인 조선족 청년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국 대기업에 취업했단다. 할아버지 고향은 밀양이며, 구한말 헤이룽장성으로 이주했다. 현재 부모님은 서울에 정착했지만 자신은 직장 문제로 중국에 남았단다. 청년의 여행 목적은 단 한 가지. 중국산 자동차 판매를 위한 아프리카 현지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넉 달 동안 아프리카 전역을 누비며 국가별 자동차 구매력·경쟁국·지역문화를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자료수집 방법도 단순했다. 이미 진출한 다른 나라 자동차 대리점에 고객인 양 들어가 가격흥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산 자동차를 빌려 지방 도시를 순회한다. 판로 개척 비용은 본사에서 무제한 지원한다고 했다. 

곳곳의 무장 경비원…불안한 치안 상황
나이로비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까운 거리에 숙소를 구했다. 외국에 머물 땐 야간 이동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숙소 밖으로 나가니 혼자 다니기가 불안했다. 소총으로 무장한 은행 경비원들이 살벌한 눈초리로 행인들을 지켜본다. 찌그러진 만원 버스가 정류소에 도착하자 무질서하게 승객들이 올라탄다. 버스 문짝에 붙어가는 일도 예사다. 위험천만이다. 양철지붕 밑의 커피숍에 들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컴컴한 실내 분위기가 무서웠다. 시내 외곽의 녹슨 양철판 가옥촌,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아이들과 치솟는 빌딩을 보면서 빈곤과 개발의 극명한 대조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이로비 도심은 자동차보다 걸어가는 것이 빠를 정도로 도로 정체가 심했다. 그래서 ‘퀵 오토바이’가 대중교통을 대신한다. 노련한 기사는 차량 사이 바늘구멍만 한 틈만 보이면 뛰어든다. 심지어 역주행도 불사한다. 야트막한 도로 턱을 가볍게 점프하는 묘기까지도 보여준다. ‘스릴 만점, 신속도착, 초저가 요금’이란 장점은 있지만 돌발사고가 나면 대책이 없다.

케냐 나이로비국립박물관 전경
케냐 나이로비국립박물관 전경

 

식민지 역사를 보여주는 국립박물관
나이로비국립박물관은 이 나라의 역사·문화·자연을 알려주는 유일한 장소다. 역사전시실은 식민지 시절, 1·2차 세계대전, 독립투쟁, 국가 비전 등을 보여준다. 19~20세기 유럽 열강들에 아프리카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케냐는 원래 여러 부족 왕국이 존재했다. 하지만 1895년 영국 보호령이 됐고, 원주민들은 순식간에 노예로 전락했다. 영국은 몸바사·나이로비·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해 아프리카 자원을 확보했다. 기독교를 앞세운 과학·교육·의료정책을 펴면서도 원주민 저항은 용서치 않았다. 부족끼리 서로 이간시켜 잇속을 채웠다. 1·2차 세계대전 때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케냐 청년들이 유럽 전선으로 내몰렸다. 일본이 20만 명의 조선 청년들을 태평양전쟁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던 역사와 같았다.

그러나 훗날 케냐 청년들의 전투경험은 독립투쟁의 근간이 됐다. 1950년대 케냐의 독립전쟁은 절정에 달했다. 영국은 대규모 진압부대를 파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전쟁에서 수만 명의 케냐인이 목숨을 잃었다. 드디어 1963년 12월 12일 결국 케냐는 독립했다. 70여 년의 식민지 생활을 끝냈지만 케냐는 정쟁, 쿠데타, 테러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으로 향하는 케냐 청년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으로 향하는 케냐 청년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케냐 장병을 기리는 동상.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케냐 장병을 기리는 동상.






케냐 나이로비 우후루 독립기념공원 입구.
케냐 나이로비 우후루 독립기념공원 입구.


독립투쟁의 성지 우후루공원
나이로비에 있는 우후루공원(Uhuru Gurdens)은 케냐 독립운동의 성지다. 이 공원에는 독립기념탑과 전쟁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국립박물관을 답사한 뒤 입구로 나오니 퀵 오토바이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도 앱을 살펴보니 우후루 공원까지는 대략 15분 거리. ‘퀵 드라이브’가 시작되자 오토바이는 자동차 사이를 귀신같이 헤치고 나간다.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좁은 공간을 기사는 과감하게 파고든다. 노련하다. 양다리를 꽉 조이며 우악스러운 기사의 허리를 힘껏 안았다. 

그런데 예상한 15분 거리가 30분을 훌쩍 넘긴다. ‘혹시 외국인 납치범?’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왔는지 수시로 물으니 기사는 엄지만 치켜든다. 숲이 우거진 언덕길로 접어드니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인적도 드문 곳인데 탈출 방법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공원 앞에서 오토바이가 멈췄다.

어렵게 찾아온 유적지지만 대규모 보수공사로 출입 금지였다. 하는 수 없이 공원표지판만 사진을 찍었다. 숙소 도착 후 오토바이 기사와 통성명했다. 납치범으로 오해했던 그는 결혼 3년 차에 두 살배기 아기가 있는 순진한 청년 파트리우라고 소개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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