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이제 다시 ‘책’이다

입력 2026. 03. 11   14:45
업데이트 2026. 03. 1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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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소년들에게 실천하기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책 읽기’를 꼽는다. 서점가엔 이러다가 ‘책’이라는 종이매체의 존재감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인공지능(AI)으로 무장한 디지털기기들이 책을 요약해 주고 문학작품까지 대신 써 주는 시대이다 보니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마저 찾기 어렵게 됐다. 도서 유통망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서점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보면 관계자들이 엄살을 부린다고 치부하기도 힘들다. 과연 ‘책의 시대’는 이대로 저물고 마는 걸까.

언제였던가. 어느 잡지엔가 좋은 책을 소개하는 글 서두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일까? 수도 없이 고민해 온 문제이지만, 그 정체는 여전히 묘연하다. 주체하기 힘든 책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 만드는 일에 매달린 이후 새로운 책을 만나는 날이 쌓일수록 판단력은 혼미해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아니, 행복하다. 벽면을 점령해 가는 책들의 진군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만은 정말 행복하다. 불안하면서도 행복한 이중성의 나날. 그러면서도 늘 책과 더불어 사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좋은 책을 향한 갈증이 곧 독자 본연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2001년 대학 전임교원으로 부임해 처음 개설한 교양과목이 ‘독서와 생활’이었다. 이후 학기마다 이 과목을 시작하는 첫 시간이면 어김없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소개하곤 한다. 그때마다 손에 들려 있던 『역사란 무엇인가』의 판본은 1982년 ‘탐구당’에서 간행했던 문고본(길현모 옮김)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정신적으로 갈팡질팡할 때 의식을 다잡는 계기가 돼 준 책이었다.

카는 이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설파하면서 역사가의 임무는 “역사의 인과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한때 대학생이었듯이 오늘을 사는 대학생 역시 언젠가는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할 것이므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른바 지성인 혹은 지식인이 고뇌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 또한 역사가의 임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나아가 올바른 과거 해석을 토대로 현재를 꾸려 나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 곧 ‘역사 바로 세우기’일 것이다. 거기에 터 잡아 경제 부흥을 꾀하고 삶의 질을 높여 나갈 때 진정한 복지국가가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비록 당장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행위가 바로 책 읽는 일임에도 그것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언젠가 읽었던 책이 쌓이고 쌓여 삶의 토대가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나 할까.

검색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많은 영상정보 중에도 금과옥조로 삼을 만한 내용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그런 접근법에 선택을 위한 사색의 과정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독서와 달리 대개의 시청행위에는 사고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현재와 과거 속에서 ‘끊임없는 대화’를 주선해 준 건 다름 아닌 ‘책’이었던 셈이다.

이런 책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책 읽기를 인생의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져야만 스스로 생각하는 이가 늘어날 것이다. 그래야만 AI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부리는 세상이 완성된다. 우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첨단 디지털기기로부터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질감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책’을 펼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김기태 세명대학교 미디어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김기태 세명대학교 미디어콘텐츠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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