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열
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포르투갈 토마르 성채 '탬플 기사단의 마지막 안식처'
십자군 원정 이후 동력 잃은 템플 기사단
막대한 재산 노린 佛 필리프 4세가 해체
남은 단원들 포르투갈 토마르 성채로…
디니스 1세,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재편
무슬림 해적에 맞서 해상 보호로 눈 돌려
해양 팽창정책에 융합, 항로 개척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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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중세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은 지중해 서쪽 맨 끝단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중세 말까지 만년 후진국 신세였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대항해 시대의 선두 주자로 올라서며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바스코 다 가마는 1492년 당시 값비싼 향신료의 주생산지이던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 지금까지 세계사에 당당하게 이름을 남기고 있다.
어떻게 해서 후진국 포르투갈은 대서양 항로 개척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을까? 통상 세계사 교과서에는 ‘항해 왕자’로 불린 엔리케 왕자라는 걸출한 선각자가 있어 가능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의 영도 아래 대항해가 가능하도록 실제로 계획하고 행동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 이면에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십자군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의 활약이 숨어 있다. 포르투갈 중부 지방에 있는 토마르 성채(Castelo de Tomar·198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에서 그 증거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1세기 말~13세기 말에 이르는 약 200년은 서양 중세사에서 가장 폭력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를 관통한 핵심 사건은 바로 십자군 원정(the Crusades)이었다. 이는 흔히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향해 벌인 종교전쟁’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종교를 축으로 제반 분야가 중첩된 복합적 현상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고 호소했다. 그 결과 1096년 출발한 1차 십자군 원정대는 3년 만에 ‘예루살렘 점령’이라는 희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승리는 곧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성지 점령은 달성했으나 이를 유지하고 보호할 제도 및 군사적 수단이 부재한 상태였다. 여기에서 템플 기사단의 역사가 시작됐다. 1차 십자군의 성공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기독교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문제는 성지로 향하는 길이 여전히 위험천만했다는 점이다. 산악 지대와 사막, 이슬람 잔존 병력과 산적 무리는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됐다.
1119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프랑스 출신의 기사 위그 드 파앵과 수도자로 서원(誓願)한 소수 기사들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개인적 영달이나 전리품 획득이 아니라 성지를 향한 순례자의 안전망 확보를 사명으로 내세웠다.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 보두앵 2세가 이들에게 옛 솔로몬 성전 유적지 부근을 거처로 제공했다. 바로 여기에서 ‘성전 기사단’ 즉 템플 기사단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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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템플 기사단은 소규모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1129년 로마 교황청 승인을 계기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로써 기사단은 단순한 자발적 무장 집단에서 교황 직속의 초국가적 군사·종교 조직으로 격상했다. 중무장 기병이 주력이던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수립된 십자군 국가들의 핵심 기동 타격대처럼 활약했다. 특히 중동의 수많은 전장에서 최후까지 대형을 유지하며 싸운 ‘결코 항복하지 않는 자들’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3세기에 접어들어 십자군 원정이 동력을 상실하면서 템플 기사단의 기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가 이슬람 세력에 함락되면서 성지에 존재한 십자군 국가는 완전히 사라졌다. 당연히 기사단의 존재 이유도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이들은 유럽 내에 여전히 막대한 부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활약해야 할 성전(聖戰)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해 템플 기사단을 몰락으로 이끈 인물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였다. 당시 잉글랜드와의 전쟁 수행 및 왕권 강화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그가 기사단의 재산을 가로채려 한 것. 1307년 10월 필리프 4세는 전격적으로 프랑스 영토 내 템플 기사단원들을 체포한 뒤 이들에게 각종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급기야 마지막 기사단장을 화형에 처하며 기사단 자체를 해체시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잔존 단원들이 포르투갈의 토마르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에서는 철저한 탄압이 이뤄졌지만 포르투갈에서는 기사단원 개인에게 범죄 혐의가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토마르는 템플 기사단에게 낯선 피난처가 아니었다. 토마르는 이미 12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 기반 템플 기사단의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수도원과 군사 시설의 결합 형태로 강력한 성채가 있던 이곳은 타호강 유역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랑스에서 탄압이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유럽 내 잔존 기사단원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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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가 정치적 묘수를 부렸다. 1319년 교황 요한 22세의 승인을 받아 ‘그리스도 기사단’을 창설하고 토마르에 있던 템플 기사단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산을 신생 기사단으로 이전시켰다. 이제 이들은 포르투갈 왕권의 직접적 보호와 통제 아래 놓였다.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재편된 옛 템플 기사단원들은 더는 예루살렘 성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이들의 시선은 대서양으로 향했다. 무슬림 해적에 대한 해안 방위, 북아프리카 전초기지 유지, 해상 항로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점차 당시 포르투갈의 해양 팽창 정책에 융합됐다. 이 시기 포르투갈 선박의 돛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에서 템플 기사단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포르투갈 중부 도시 토마르에 있는 수도원이자 성채는 누가, 언제, 어떻게 건설했을까? 토마르 성채의 창건자는 포르투갈 템플 기사단의 초대 단장이던 구알딤 파이스였다. 파이스는 1160년 이곳에 성채 건설에 착수했다. 토마르 성채의 중심엔 기사단에 의해 12세기 후반기에 세워진 샤롤라(Charola)란 이름의 예배당이 있다. 이곳은 보통의 수도원 성당과 달리 8각형 모양의 중앙 제단과 그 주위를 감싸고도는 원형 회랑 구조로 설계돼 있다. 그 덕분에 기사들은 말에 탄 채 내부 회랑에 둘러서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샤롤라는 종교의식과 전투 행위가 분리되지 않던 시대에 전사이자 수도사로 활약한 기사단원들을 위한 전용 예배 공간이었던 셈이다.
토마르시 외곽 약 200m 높이의 언덕배기에 세워진 ‘그리스도 수도원’은 단일 건축물이 아니라 성채·원형 성당·수도원군(群)·부속 시설 등이 어우러진 일종의 복합건축 단지이다. 이는 성전(聖戰) 시대, 기사단 시대, 왕권 시대, 대항해 시대가 누적된 유산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토마르는 ‘건물’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층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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