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진창과 기관총 소염에 묻힌 노래... 전우여 깨어나 함께 가자, 집으로

입력 2026. 03. 10   15:17
업데이트 2026. 03. 1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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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베르뒹 전투에 참전한 모리스 라벨과 ‘쿠프랭의 무덤’

뫼즈강 낀 전쟁 요새 베르뒹 둘러싸고 
프랑스 vs 독일 자존심 건 한판승부
지루한 참호전, 獨 중단으로 전투 끝나
참전병이자 佛 대표 음악가 라벨
6개 악장 구성 ‘쿠프랭의 무덤’ 완성
전쟁에 희생된 이들에 헌정하며 추모

1916년 베르뒹전투 당시 참호에서 전투 중인 프랑스군. 필자 제공
1916년 베르뒹전투 당시 참호에서 전투 중인 프랑스군. 필자 제공


‘마른의 기적’으로 독일의 진격은 프랑스 파리 북부 마른강 방어선에서 저지됐다. 그리고 참혹하고 기나긴 참호전과 소모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짓고 그해 크리스마스는 집에 가서 보내겠다는 병사들의 소망은 진흙탕과 기관총 소염 속에 묻혔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기관총은 전쟁 양상을 바꿨다. 양측은 모두 참호를 깊이 파고 장애물을 설치한 뒤 상대를 주시하다가 참호 밖으로 나오는 적에게는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전쟁의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모리스 라벨, 자원해 베르뒹 전투 참전
‘볼레로(Bolero)’로 잘 알려진 모리스 라벨(1875~1937)은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늦은 나이인 39세에 자원입대를 결심, 공군에 지원했지만 실패하고 트럭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라벨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근무했는데, 그가 배치된 곳이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프랑스 북동부 베르뒹(Verdun)전투 현장이었다.

베르뒹전투는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합쳐 약 240만 명이 동원돼 8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치열한 전투다. 라벨이 맞닥뜨린 베르뒹전투 현장은 참혹했다. 많은 동료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라벨도 1917년 다리를 다치고 복무를 마쳤다. 

전사자를 위한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
그는 1914년 모음곡을 준비하다가 참전했다. 전쟁으로 중단된 그의 작업은 제대 후 다시 시작됐다. 1917년 6월 6개 악장으로 구성된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을 완성해 전쟁에 희생된 이들에게 헌정했다. 그래서 6악장의 각 곡 제목은 전사자의 이름을 붙였다. 쿠프랭(Francois Couperin)은 17~18세기 로코코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이름이다. ‘tombeau’는 무덤이라는 의미보다 ‘기념 또는 추모 음악’의 의미로 사용됐다. 

바로크·로코코 시대에는 모음곡 형식이 유행했는데 라벨은 로코코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쿠프랭의 예술성을 찬미하고 쿠프랭의 ‘오르드르(일종의 모음집)’에서 착안해 ‘쿠프랭의 무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온화하며 때로는 명랑한 분위기도 연출된다. 이는 로코코 시대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라벨은 밝은 피아노 모음곡으로 쿠프랭의 아름다운 음악을 기리면서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전우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

독일군의 새로운 돌파구 베르뒹
독일은 프랑스 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참호전으로 전환되자 재정비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공격을 모색하게 됐다. 이 가운데 독일이 주목한 지역은 베르뒹이었다. 베르뒹은 프랑스 북동부의 독일과 접경인 메스, 낭시(알자스·로렌) 지역 후방에 있는 곳으로, 뫼즈강을 끼고 있어 방어하기 매우 좋은 곳이다. 전통적으로 과거 1871년 보·불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패할 때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던 곳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이 걸린 지역이었다. 

독일은 베르뒹 지역에 포병 공격과 공습을 통해 강력한 화력을 퍼붓고 병력을 기동시켜 뫼즈강을 건넘으로써 프랑스 내륙으로 공격해 들어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이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포병과 물자를 이동하고 있었지만 베르뒹을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는 다른 지역으로 공격할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르뒹에 배치된 부대 일부를 다른 지역으로 전환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계획대로 9개 사단으로 구성된 병력 14만여 명, 1500여 문의 포, 예비대까지 집결시키며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수십만 발의 포탄 속 절체절명의 프랑스
마침내 1916년 2월 21일 독일은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 그런데 포격만 하고 본격적인 기동에 의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 지휘관은 포탄 공격만으로 프랑스군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포격은 병력이 기동해 최종목표를 탈취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 전리(戰理)다.

포격 이후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독일은 공격 시작과 함께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여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어 독일 병력이 기동하며 프랑스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수적으로 열세한 프랑스는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후퇴해야 했다. 프랑스는 현장지휘관을 교체하며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다. 새롭게 교체된 지휘관이 그 유명한 필리프 페탱(1856~1951) 장군이었다. 

베르뒹을 지켜낸 프랑스의 페탱 
페탱은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해선 그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줘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는 약 20만 명의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베르뒹 남부 60㎞ 지점에 있는 바르르뒤크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고 군수물자와 병력 보충을 서둘렀다. 페탱은 전선의 지친 부대와 후방부대를 교대시켰고, 그 부대가 지치면 후방에서 휴식을 취한 병력과 교대시키며 전투에 들어갔다. 

페탱의 이 조치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 더구나 작전 중 폭우가 많이 내려 장비가 이동해야 하는 도로가 완전히 진흙탕이 됐다. 이는 무거운 포병 장비의 전진을 곤란하게 함으로써 전방에서 전진하는 기동부대를 적시에 따라가 화력으로 지원하는 포병의 본래 기능을 약화시켰다. 전세는 역전됐다. 프랑스는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거듭했다.

이 무렵 독일군은 솜 지역 전투를 위해 더는 병력 증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양쪽은 상호 진지를 구축하고 포격전과 소규모 공세 행동을 지속하는 참호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월 독일군이 작전을 중단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독일은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더는 프랑스로 진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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