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⑮ 독립운동과 서화: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1919년 종로에서 시작된 3·1운동의 함성은 전국을 들불처럼 뒤덮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있었고, 이에 감응한 젊은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멀리 중국으로,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피신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에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민주공화제와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결성된 것이다. 나라의 독립이라는 큰 뜻을 위해 삶과 죽음의 기로 앞에서 총칼과 고문의 위협을 무릅쓴 독립운동가 중에는 서화를 매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두문불출했던 위창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고 비밀리에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감수했다. 3·1운동 당시 오세창은 수감됐고, 3년 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으며 1921년 가석방됐다. 오세창의 회고에 따르면 서대문형무소를 출옥한 이후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형사가 미행했고, 이를 피해 개인적으로 삼일절을 기념했다고 술회한다.
1910년까지 개화기 지식인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오세창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외부 활동을 접고 옛사람의 글과 그림을 수집하고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역대 서화가들에 대한 기록을 모아 『근역서화사(槿域書?史)』를 집필했다. 당시 망한 나라 조선의 예술에 대한 폄훼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삼천리 무궁화 땅에 살았던 서화가들의 면면을 기록해 이 나라에 유구한 예술의 역사가 있었음을 다시금 깨우치게 했다.
강원 영월 태생인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1883~1950)는 을미의병(1895)에 뜻을 모은 의암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의병활동을 한 김진우에 대한 행적은 모호하지만, 1917년 서울 종로에 서화상(경성부 종로통 4가 92)을 열어 생업에 종사하며 서화미술회에서 서화를 수련했다.
1919년 어느 날 김진우는 홀연 상하이로 떠난다. 이후 임시정부 수립 후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됐다. 임시의정원 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임시헌법과 관제 개정에 참여했고,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원도 영월 조사원으로 임명됐다. 1921년 3월에 의원직을 사직하고, 6월 귀국길에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이용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황해도 해주감옥 서흥분감에 수감돼 192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김진우의 제자인 조기순(1913~2010)에 따르면 김진우는 투옥 중에도 자리에 깔던 깔개를 뜯어 붓을 만들고 맹물로 마룻바닥에 한없이 대나무를 그리는 방법을 연습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노동으로 모은 돈을 서흥의 사립광리학교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보여줬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줄곧 출품해 특선과 입선을 하며 묵죽의 대가로 명성을 쌓아갔다. 1928년 당대 유명 비평가인 김복진은 그의 대나무를 빗대 “특별한 푸른 화살(特製靑矢)”이라 칭했다. 후대 연구자들은 김진우의 날카로운 댓잎을 표현한 독자적인 필법을 ‘창검체(槍劍體)’라고 부르기도 하고, 호를 따서 ‘일주죽(一洲竹)’이라 일컬었다.
‘묵죽’(1933)은 굵은 왕죽의 부드러우면서도 꼿꼿한 줄기와 날카로운 댓잎을 그리고 있어 김진우 특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림 옆에 적은 제화시와 함께 묵죽의 참된 의미를 보여준다.
自有貞堅千古節
곧고 굳은 오랜 절개를 지니고 있어
不關窓外雪霜寒
바깥 눈과 서리의 찬 기운을 개의치 않네.
時癸酉仲春 寫於錦南之寶文山中
계유년(1933) 2월 금남의 보문산에서 그리다
1930년대 들어오며 사군자는 더 이상 ‘미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구태의연함을 보여주는 장르로 비평가들에게 비판 대상이 됐다. 이와 같은 현실이었지만 김진우는 당시 사군자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고, 겉으로는 활발한 서화 활동을 펼치며 물밑으로 독립운동을 꾸준하게 지원한 것으로 전한다.
같은 시기 대구에서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1876~1934)이 활동했다. 그는 대구에 나고 자랐으며, 1908년 중국을 유람하며 당시 유명한 화가들과 교유할 기회를 얻었다. 대한광복회회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1916년 음력 8월 15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구권총사건(애국단사건)’ 주모자로 지목됐다. 당시 김진만과 동지들은 대구의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김진만은 대구의 부호이자 자신의 장인인 서우순의 집에 있는 현금을 훔치려다가 권총을 발사해 일이 발각됐고, 이후 10년형을 선고받고 약 8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동생인 김진우(金鎭瑀·1881~?)와 둘째 아들 김영우(金永祐·1895~1926), 손자 김일식(金一植·1911~?) 삼대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가문이었다. 큰아들인 김영조와 셋째 아들 김영기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세 아들은 김진만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진만은 옥고를 치른 후 일제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으며 서화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당시 대구 서화계의 원로인 서병오(徐丙五·1862~1935) 집을 드나들며 김진만은 사군자와 괴석, 기명절지화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면서 대구 화단의 중심축이 됐다. 출옥 이후 약 9년간 활동했던 김진만은 자신의 작품에 제화시와 호를 남길 뿐 의도적으로 그림에 관한 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그린 서화를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김진만의 ‘묵란’은 묽은 붓으로 뿌리를 드러낸 채 거칠게 그렸지만, 난의 향기만큼은 오롯이 은은하게 퍼질 듯하다. 제화시는 중국 청나라 화가인 정섭(鄭燮·1693~1765)의 시를 옮겼다.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면 다시 산으로 돌아가리라’는 시구와 담박한 난의 풍취는 김진만의 삶을 대변하듯 지사(志士)의 풍모를 보여준다.
글과 그림은 삶의 궤적이다. 무엇보다 시대를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고마운 서화가들의 흔적을 뜨겁게 기억해 주자.
|
|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