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종교 이전에 사람… 지워진 전쟁의 상흔, 관용의 징표만 남아

입력 2026. 02. 25   15:46
업데이트 2026. 02. 2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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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스페인 톨레도 ‘알카사르’ :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방어의 중심축 

중세 기독교·이슬람 세력의 접점지
11세기말 톨레도 탈환 전쟁의 승자
알폰소 6세, 다문화·종교활동 보장
융합의 흔적,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
각 변 60m·높이 60m 정방형 ‘궁전’
방어·통제에 유리…거대한 돌 요새

알카사르. 사진=필자 제공
알카사르. 사진=필자 제공


나이가 지긋한 분은 1961년 개봉한 할리우드 배우 찰턴 헤스턴 주연 ‘엘 시드’란 영화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헤스턴은 이 영화에서 중세 스페인 카스티야 장군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이른바 ‘엘 시드(El Cid)’ 역을 맡았다. 영화는 11세기 후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공존·충돌한 중세 스페인의 격동기를 장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때 영화의 중요 무대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위치상 두 종교 세력의 접점 지대로 충돌이 잦던 톨레도(Toledo)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 거리에 있는 톨레도는 타호강이 크게 휘감아 도는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강과 절벽이라는 천혜의 방어 조건은 이곳을 로마 제국 이래 긴 세월 동안 치열한 싸움터로 만들었다.

기원전 200년경 로마가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하면서 톨레도는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애초부터 로마는 톨레도를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군사 거점으로 인식했다. 타호강을 따라 형성된 교통망을 통제할 수 있음은 물론 중북부 내륙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이곳에 성벽과 도로, 교량을 건설해 도시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톨레도는 대규모 전투의 중심지는 아니었으나 ‘전쟁을 대비하는 도시’로서 정비, 발전했다.

톨레도 시가지 전경. 사진=필자 제공
톨레도 시가지 전경. 사진=필자 제공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베리아반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서고트족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이 시기에 톨레도는 정치와 종교, 전쟁 수행이 한 덩어리로 일체화된 도시였다. 이때의 건축물은 반복된 전쟁과 재건 속에서 거의 모두 사라졌지만 톨레도가 ‘수도이자 요새 도시’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8세기 초 톨레도의 주인은 이슬람 세력으로 바뀌었다. 이 기간 톨레도는 군사 도시이자 다문화 도시로 재편됐다. 이슬람 정복자들은 기존 요새 구조를 유지 및 강화하는 동시에 성벽과 탑은 물론 도시의 전반적인 구조를 재정비했다. 톨레도에는 점차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공존하는 독특한 사회가 형성됐다. 융합의 용광로 속에서 톨레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카스티야의 통치자 알폰소 6세의 초상. 사진=필자 제공
카스티야의 통치자 알폰소 6세의 초상. 사진=필자 제공


국경 도시 톨레도 형성에 영향을 준 진정한 전쟁의 소용돌이는 11세기 말 몰아쳤다. 이 시기 톨레도는 스페인 북부 기독교 세력이 추진한 이베리아반도 재(再)정복 전쟁의 상징과 같은 도시로 떠올랐다. 1085년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통치자 알폰소 6세가 일명 ‘톨레도 탈환 전쟁’에서 승리하며 도시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도시 함락이 아니라 재정복 운동의 상징이 됐다. 알폰소 6세의 톨레도 탈환을 계기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지배 지역인 반도 남부로 본격적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자였던 알폰소 6세는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이베리아반도의 복합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정복 이후에도 무슬림과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 활동과 법적 지위를 상당 부분 보장했다. 이러한 융합과 관용의 징표는 오늘날 톨레도에 있는 여러 건축물에 남겨져 있다.

1986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톨레도는 볼거리로 넘쳐난다. 다양한 유적 중 압권은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고 있는 ‘알카사르’다. 알카사르는 톨레도의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가장 체험적으로 전쟁 관련 기억을 응축해 놓은 건축물이다. 톨레도 역사 전체를 압축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알카사르는 시대마다 달라진 권력의 성격과 전쟁의 양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 변천 과정을 뒤쫓다 보면 톨레도가 ‘전쟁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알카사르가 자리한 곳은 톨레도에서 가장 높은 바위 언덕이다. 이 지형적 조건은 처음부터 군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미 로마 시대에 이곳에는 감시와 방어를 위한 군사 요새가 자리했다. 로마는 톨레도를 내륙 방어망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고,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최적의 전술적 감제(柑制) 고지였다.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해온 서고트 왕국이 톨레도를 수도로 삼으면서 알카사르는 최상위 통치자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변했다.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면서 알카사르는 다시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기존 요새를 파괴하기보다는 재활용하고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알카사르’라는 명칭 자체가 아랍어 알카스르(성채 또는 궁전)에서 유래한 것도 이 시기 흔적이다. 이때 알카사르는 군사 요새이면서 동시에 행정과 거주의 기능을 겸한 복합공간으로 격상했다. 방어용 성벽과 탑을 강화하면서 내부에는 생활공간을 조성했다. 전쟁을 대비하는 성이면서도 통치자가 머무는 궁전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동시에 전쟁 속에서도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 등 인종·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도시 안에서 공존하며 융합의 문화를 꽃피웠다.

1085년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알카사르는 다시 기독교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도 알카사르는 완전한 신축이 아니라 기존 이슬람 요새 구조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변형됐다. 알카사르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스페인이 제국으로 성장하던 16세기경이었다.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가 이곳을 중세 스타일 성채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위엄 있는 궁전으로 재건했다.

알카사르 내부 모습. 필자 제공
알카사르 내부 모습. 필자 제공


알카사르의 실제 모습은 어떠할까? 건물의 전체 평면은 정방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구성돼 있다. 각 변의 길이는 약 60m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성채 가운데서도 큰 규모에 속한다. 방어와 통제에 유리한 정방형 구조는 내외부를 명확히 구분해 병력 배치·이동의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하게 했다. 알카사르의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모서리마다 세워진 약 60m 높이의 네 개의 대형 탑이다. 이는 시야가 중첩되도록 배치돼 성벽을 따라 접근하는 적을 교차 사격할 수 있다. 두껍고 단단한 외부 석벽 구조로 인해 오늘날 알카사르는 ‘궁전’이라기보다는 흡사 ‘거대한 돌의 요새’ 같은 느낌을 풍긴다.

톨레도는 낭만의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는 수없이 외침을 받고 점령당했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재건됐다. 무엇보다 이러한 반복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새로운 정복자들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 올렸다. 톨레도야말로 전쟁이 파괴만 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터전 위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전쟁사 속 유적지임이 분명하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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