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예술: 펠트 모자와 ‘비버 전쟁’
촘촘한 구조로 형태 변형 거의 없는 비버 털
16세기 유럽서 수요 폭발…남획에 자취 감춰
북아메리카 신대륙 발견하며 ‘비버전쟁’ 시작
모피 무역 독점 경쟁, 원주민 사회 균열로 번져
18세기 들어서 유행 저물고 실크 소재 급부상
귀족의 사치품에 대한 탐욕 세계지도 뒤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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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추운 날 거리를 걷고 있으면 패딩코트 사이로 모피코트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손에 닿는 질감과 보온력은 울코트와 분명히 다르다. 부드러운 모피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기에 앞서 세계대전의 단서를 던졌다고 하면 믿어지는가? 본 칼럼에서는 여러 모피 중에서도 비버(beaver) 모피가 시장을 넘어서 세계지도와 전쟁 형태를 흔든 경로를 추적한다.
16세기 유럽에서 모자는 사회계급의 표식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펠트 모자는 형태를 유지하며 비를 튕겨내 귀족과 상인들이 이 재질을 선호했다. 펠트는 직물이 아니다. 섬유를 짜지 않고 수증기와 압력, 마찰로 생긴 엉김으로 만든다. 이때 털끝에 있는 미세한 갈고리가 핵심 역할을 한다. 비버 털은 이 구조가 특히 촘촘해 한 번 굳으면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양모나 토끼털은 이 밀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도시를 중심으로 비버 모피 수요가 증가하자 파리와 런던 등에서 펠트 모자 길드(guild)가 생겼다. 길드는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 도시를 중심으로 장인이나 상인이 조직한 조합이다. 17세기 초 모자 제작자는 원료 확보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의 비버 포획으로 유럽 비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독일, 프랑스, 폴란드 하천에서 흔했던 ‘비버의 댐’에 대한 기록도 점차 줄어들었다. 비버는 ‘자연의 건축가’라 불릴 만큼 댐짓기에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다. 안전과 생존 이유로 물이 흐르는 곳에 댐을 쌓아 얕은 호수나 연못을 만들어 물속에 집을 지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먹이인 나무껍질을 저장하는 장소를 마련한다.
결국 상인과 공인(工人)은 비버를 찾아 다른 하천을 헤맸다. 그들의 시선은 대서양 너머 신대륙을 향했다. 당시 북아메리카는 아직 비버가 많이 서식했다. 그들에게 북아메리카는 비버 모피를 위한 반드시 장악해야 할 또 다른 수급처가 됐다.
17세기 초 프랑스는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교역선을 세웠다. 프랑스 상인은 토착민족인 휴런, 앨곤퀸과 동맹을 맺고 모피를 모았다.
산업 경쟁국이었던 네덜란드는 다른 길을 택했다. 미국 뉴욕주 동부 허드슨강 하구에 닿은 네덜란드 상인은 내륙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이로쿼이 연맹과 손을 잡는다. 이로쿼이 연맹은 오늘날의 업스테이트 뉴욕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이로쿼이 제족들의 부족연맹체다. 모호크를 중심으로 오네이다, 오논다가, 카유가, 세네카 등 다섯 부족은 16세기 후반 들어 강력히 결속했다. 연맹 내 각 집단은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했지만 전쟁과 외교에서는 연맹의 결정을 따랐다. 단순 부족 연합이 아니라 합의와 대표를 통해 움직이는 느슨하면서도 엄밀한 정치 조직이었다. 이 가운데 모호크는 연맹 동쪽 끝 허드슨 강과 가까운 위치 덕분에 유럽 상인과 가장 먼저 교역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과 올버니 일대에 교역 거점을 세우자 모호크는 자연스럽게 중개자 역할을 차지했다. 이로쿼이 연맹이 네덜란드와 직거래를 열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무역거래를 통해 비버 모피는 더 빠르게 대서양을 건널 수 있었다. 비버 모피는 단순 원재료를 넘어 대양을 아우른 무역구조의 중요한 축이 됐다.
네덜란드 상인이 총과 화약을 거래 물자에 포함시키며 이로쿼이 연맹의 주변 지역은 큰 변화를 겪는다. 전통적으로 아직 활과 몽둥이가 주로 쓰이던 부족사회에 도입된 총은 사정거리와 살상력에서 기존 무기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많은 외부와의 교역은 곧 부족의 생존과 승리로 돌아왔다. 모피를 많이 모은 집단은 철제 도구와 탄약을 더 건네받아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자는 더 넓은 강줄기와 사냥터를 확보했고, 패자는 교역망에서 밀려나며 식량과 도구가 줄어들어 생계가 어려워졌다. 이 흐름은 급기야 이로쿼이 공동체 붕괴로 이어졌다.
비버 확보는 부족의 단순 소득과 생존을 넘어서 다음 계절을 버티는 조건, 동맹을 유지하는 조건, 이웃을 밀어내는 조건이 됐다. 허드슨강의 비버가 오랜 남획으로 씨가 마르기 시작하자 연맹은 내륙으로 눈을 돌렸다. 이 시점에서 이로쿼이 연맹은 프랑스 무역망과 정면충돌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이로쿼이 연맹은 인접 지역으로 움직였다. 모피를 못 구하면 총과 화약도 끊기기 때문이다. 연맹은 비버가 남은 강줄기와 호수 쪽으로 전사들을 보냈다. 모피 수급처를 넓히기 위한 이로쿼이 연맹의 침공으로 ‘비버 전쟁(Beaver Wars)’이 시작됐다.
창 대신 총을 앞세운 연맹 전사들은 중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했다. 상대는 방어선이 무너져 마을을 떠나버렸고, 긴 강길이 연맹을 향해 활짝 열렸다. 이 이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기서도 비버 개체수가 줄어들면 전선도 다시 옮겨갔다. 이로 인해 1648년부터 1650년 사이 경쟁자 휴런 연맹이 크게 붕괴하며 프랑스가 믿던 내륙 교역망도 같이 동요했다. 살아남은 집단은 흩어져 다른 땅으로 이동했다. 난민이 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인구가 줄어드니 사냥과 방어는 더 어려워졌다. 이는 이로쿼이가 승리했음에도 진군을 멈추지 못한 중요한 요인이다. 싸움은 오하이오 계곡으로 번졌고, 전선은 서쪽으로 계속 뻗어나갔다.
이윽고 프랑스는 세인트로렌스강 축에서 이로쿼이 연맹과 격돌했다. 프랑스가 이끈 동맹은 휴런·앨곤퀸을 통해 모피를 모았지만 총기 보급은 넉넉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로쿼이는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과 교역하며 화승총과 화약을 꾸준히 들여 사용법과 전술을 익혔다. 모호크가 허드슨 강 길목을 장악하며 거래 창구를 지켰고, 연맹이 주도하는 확장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주변 부족은 강길과 사냥터를 잃었다. 비버 펠트 모자의 유럽 시장 수요는 여전히 확고했고, 프랑스는 비버 모피를 동력으로 삼은 이로쿼이에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결국 1701년 프랑스는 몬트리올에서 30여 개 부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종전 선언이자 교역 질서 재정비였다. 그제야 이로쿼이는 팽창을 멈췄다. 이로쿼이 연맹은 독립 세력으로 프랑스령 캐나다와 영국 식민지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인정받았으나 오하이오 계곡은 전쟁 뒤에도 불안정했다.
1756년 5월 17일 발발한 7년 전쟁은 비버 전쟁의 연장선이었다. 북미 전장은 비버 모피가 만든 공간 경쟁을 정리하는 계산서가 됐다. 유럽에서 발발한 이 전쟁 중 영국·프랑스 두 열강은 전장을 북미까지 확대했으며, 이로쿼이는 영국 진영에 서서 전선에 가담했다. 이 구조는 훗날 모든 자원과 시장을 두고 벌어진 근대 총력전 양상을 미리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실크 모자와 톱햇이 유행했다. 광택과 직립한 실루엣이 새로운 계급표식이 됐고, 비버 펠트 모자는 점차 쇠퇴했다. 수요가 줄자 비버 모피가 외교와 전선을 흔들던 시기도 끝났다. 이후 패션은 공장, 유통망, 재단 기술이 맞물린 체계가 됐고, 소비자는 가게 진열과 전단을 보며 구매를 고민했다. 전쟁은 모자와 코트를 남겼지만 원료가 건너온 강줄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비버 모피로 만들어진 옷들은 여전히 거리를 거닌다. 이 의복은 단순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투가 아니라 제국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이 남긴 잔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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