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 서울 광통교, 중부 대시(大市)가 섰던 곳
조선 청계천 다리 중 가장 크고 넓어
숭례문과 경복궁 잇는 중심 통로 위치
임금 행차 코스이자 사신들 입궁 통로
사람 통행 많아 각종 가게 몰려들어
남사당 같은 유랑예인 곳곳서 판 벌여
도화서 근접 서화 매매 문화시장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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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서린동의 광교는 조선시대에 청계천 위에 놓인 다리 중 가장 크고 넓어서 대광통교(大廣通橋)·광통교·대광교 등으로 불렸다. 광교 앞에 축소 모형으로 전시돼 있는 다리의 원래 모습에서 그 규모가 짐작된다. 도성에 놓인 여섯 번째 다리여서 ‘육교(六橋)’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 숭례문과 경복궁을 잇는 중심 통로에 있어 상징적 의미가 컸다. 1410년 큰 비로 흙다리가 유실되자 태종이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 옛터에서 가져온 무덤돌로 재건했다(『태종실록』). 임금의 행차 코스였고, 명(明)의 사신들도 빙 둘러 남대문을 지나 이 다리를 건너 입궁했다(『승정원일기』). 이 다리를 경계로 도성을 ‘우대(上臺)’와 ‘아래대(下臺)’로 구분했다. 우대는 청운동과 북촌이, 아래대는 금위영과 훈련원(현 DDP 자리)이 중심을 이뤘다. 우대는 사대부, 아래대는 서얼과 하급 무관의 공간이었다. 광통교는 중대쯤에 속했다. 인근엔 역관·의관·기술직·제조업자 등이 모여 살았다.
정월대보름 밤 광통교 답교놀이 풍속을 그린 19세기의 ‘상원야회도’와 다리 위를 지나가는 고종의 행렬을 촬영한 사진에서 광통교의 옛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광통교에서 바라보는 맑은 달을 ‘국도8영(國都八詠)’에 포함했다(『홍재전서』). 통행량이 많아 시전을 정할 때 중부의 대시(大市)로 지정됐다(『태종실록』, 10년 2월 7일). 장롱·금은·갓·가죽·마구·종이·물감·솜·실·초·그릇·정육·채소·과일 가게가 몰려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 조선 후기 청계천 일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현재의 중부시장도 중부 대시의 맥을 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닭싸움·장치기·연날리기·팽이치기 등의 전통놀이나 유흥시설도 풍경에 가세했다. 채제공과 허균·이익·박지원 등 내로라하던 사대부들이 한결같이 광통교에서 벗과 시간을 보낸 일화들을 갖고 있다. “채제공(1720~1799)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진 이가환(1742~1801)을 초대해 광통교 장막 안에서 구운 고기와 떡국을 먹으며 무릎을 맞대고 즐겁게 고금소총을 담론했다(『다산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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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복잠행을 즐겼던 성종이 어느 날 밤 광통교 아래에서 자고 있는 행인을 만난 일화도 전해진다. 경상도 홍해에 사는 김희동이란 평민이 임금에게 전복과 해삼을 선물하고 싶어 상경했는데 방법이 없어 노숙하던 중 임금과 조우하면서 충의초사 벼슬을 얻었다(『용재총화』)는 이야기다. 한양의 중심인 광통교의 이미지가 역할을 한 야담일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광통교의 장소성은 다산 정약용도 활용하려 했다. 광통교에 행인사를 설치해 연초에 지방 특산물을 별도로 받아 저장했다가 팔아 외국으로 가는 사절의 경비를 충당하려는 생각이었다(『경세유표』).
청계천 주변엔 원래 하층민이 살았으나 1760년 영조가 대규모 하천 준설과 제방 건설을 실시한 이후 홍수 위험이 낮아지고 환경이 개선되면서 중심지로 부상했다.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이 106편의 연작시 ‘한경사(漢京詞)’에 시장 풍경을 보일 듯 그렸다. ‘운종가의 저잣거리 넓고도 평평한데 보석과 비단이 햇빛에 반짝이네 수레바퀴 소리는 천둥처럼 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드네.’ 구보는 특히 시장 골목 어귀에 앉아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에 관한 묘사에서 흥미로움을 느낀다. ‘가장 긴박한 대목에서 전기수가 딱 입을 다물면 감질난 구경꾼들이 너도나도 엽전을 던져 다음 이야기를 청한다.’ 이 밖에 꽃 파는 장사치, 약 파는 사람, 도박꾼, 남사당 같은 유랑 예인 등이 시장 곳곳에서 판을 벌이는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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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없던 시절이어서 양반들도 장터 풍경에 흥미를 보였다. 대시가 활성화하자 광통교 주변에 기술직 중인이 모여들어 새로운 문화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76년에는 중인계급이 ‘육교시사(六橋詩社)’를 결성해 글을 쓰고 담론을 나눴다. 이들은 100년 전 박지원·이덕무·유득공 등 북학파가 구성했던 ‘백탑파’의 맥을 잇는 활동을 보였다. 강위는 강화도조약 체결 때 실무를 맡았다. 회원 박영선은 지석영에게 종두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한성순보 창간(1883)에 참여했다. 양반에 맞서 신분을 향상시키려는 중인과 서얼들의 ‘통청(通淸)운동’도 전개했다(『청성집』). 자의식이 자극을 받을 정도로 개화사상이 커진 데 따른 꿈틀거림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중부 대시는 문구류와 서화, 책 등을 팔며 문화시장 기능도 했다. 그림은 십장생과 병풍도, 산수화가 주를 이루었다(‘한경사’). 민화 계열이 주였음을 알 수 있다. 화원이나 유명 화가의 작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도화서가 지척인 구리개(을지로 2가)에 위치한 까닭도 작용했다. 화원은 왕의 초상화나 왕실 기록화를 그리는 전문 직군이어서 그들의 작품이 나오면서 시장 수준도 높아져 갔다. 맞춤 제작도 생겨났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하인 조희룡·이기복·전기 등이 특히 활발하게 참여했다. 소치 허련(1808~1892)도 스승 추사의 작품을 주문받는 거간 역할을 했고, 말년에는 스승의 글씨와 그림을 판각해 매매하기도 했다(『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광통교 대시가 오랫동안 왕실과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고품격 미술문화를 민간으로 파급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중인 부자들이 후원했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도 광통교 주변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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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의 서화 거래 기능이 인사동으로 넘어간 것은 입지 환경 때문이었다. 화원들이 주문을 받던 양반 고객이 권력과 돈의 대명사 격이던 북촌에 거주하다 보니 거간 입장에서는 광통교와의 중간 지역인 인사동이 중개하기에 편리했던 것이다. 인사동이 본격적인 서화골동의 중심지로 발전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인 상인들이 유통시장에 차고 들어온 까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도 남산 아래 들어서면서 인근 인사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민비의 조카 민영휘가 소장하고 있던 추사의 ‘세한도’를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가 경매에서 구입했고, 간송 전형필(1906~1962) 등 서화 애호가들이 두 곳을 오가며 미술품을 수집했다. 기존에 없던 표구 문화도 생겨나 표구점들도 성황을 이뤘다. 광통교에서 처음 형성된 문화시장이 인사동에서 그 정점을 찍은 것이다. 비록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의 예술 문화가 대중화되는 데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광통교 중부 대시를 구보는 높이 평가한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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