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한국전쟁사 수업에서 처음 접한 ‘금성지구전투’는 전공서적에 정리된 수많은 전투 중 하나였다. 날짜와 지명, 작전 경과와 결과가 명확히 제시된 서술은 전투 개요를 이해하는 데 충분했다. 이 단순명료한 기록이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 계기가 있었다. 6·25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금성지구전투에 참전했던 선배 전우를 직접 만났을 때였다.
그분의 기억 속 전투는 놀라울 정도로 교과서의 기록과 일치했다. 고지 위치부터 부대 이동의 흐름, 전우를 잃었던 순간까지 기록과 기억은 시간의 간극을 넘어 서로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록이 단순한 과거의 정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매개체임을 실감했다.
공식적인 전투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그분을 참전용사로 온전히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었을까.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개인의 희생은 시간 속에 묻혀 사라지지 않았을까. 기록은 과거를 봉인하고 종결짓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을 이어 붙이고 복원해 현재로 불러오는 통로라는 사실을 그때 분명히 깨달았다.
이 경험은 자연스레 기록관리학에 관심을 갖게 했다. 군에서 관련 교육을 신청하게 됐고, 기록관리학 석사 과정 첫 수업에서 ‘진본성·신뢰성·무결성·이용가능성’이라는 기록의 4가지 속성을 접했다. 그중에서도 ‘이용가능성’은 군 조직의 기록관리 인식 속에서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놓여 있는 속성처럼 느껴졌다.
우리 군은 방대한 기록을 생산·보존한다. 작전 명령과 상황 보고, 각종 보고서와 회의록이 하루에도 수없이 생성된다. 그러나 이들 기록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은 부족하다. 디지털화된 환경에서 빠르게 생산·보존되는 수많은 기록 가운데 다시 생명력을 얻는 사례는 많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핵심은 기록이 ‘보존되는 순간’은 아직 기록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록은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열람되고 활용될 때 비로소 존재가치를 완성한다. 기록이 이용 가능할 때 우리는 과거의 의사결정 과정을 복기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기록은 결국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며 통찰을 제공하는 도구다. 금성지구전투의 기록이 오늘날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의 용기와 희생을 증명했듯이 그 기록은 나의 인식을 시·공간 너머로 확장해 줬다.
오늘 우리가 남기는 기록 역시 우리의 판단과 선택, 고민과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 미래의 후배 전우들에게 현재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남겨진 기록’이 ‘이어질 기억’이 되기 위해 우리가 만드는 기록의 가치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돌아봐야 할 때다. 기록은 또 하나의 전선이며, 그 전선에서 우리는 미래와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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