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 서울 통의동 ‘창의궁 터’
영조의 잠저이며 효장세자 태어난 곳
딸 화순옹주에게 내줘 ‘월성위궁’ 불려
예산서 태어난 김정희 상경 어린 시절
박제가에게서 시·서·화 가르침 받고
북학파 박지원의 고증학·북학 계승
제주 유배서 돌아와 2년간 보내기도
추사 사후 50년 뒤 폐궁돼 주택가로
백송은 태풍으로 쓰러져 밑동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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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서촌 사이에 통의동(通義洞)이 있다. 조선 초에 의통방으로 분류됐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통의방으로 바뀐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 순화방의 일부도 포함한다(『서울지명사전』). 이 지역은 영조의 잠저이던 창의궁(彰義宮) 터였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 바깥에서부터 서울경찰청에 걸친 공간이었다(『궁궐지』). 도로(사직로)가 뚫리면서 남북으로 양분됐다. 창의궁은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는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의 부군 인평위 정제현의 옛집이었는데 숙종이 매입해 넷째 아들인 연잉군(영조)에게 주었다. 숙종은 창의궁 누헌(樓軒)에 양성헌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친히 시 2절을 지어 현판하게 했다. 1719년(숙종 45) 2월에는 영조의 장남이자 정조의 법적 부친으로 9세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1754년에는 사도세자의 장남이자 정조의 친형으로 2년을 채 살지 못한 의소세손의 묘(廟)를 두었으며, 정조의 장자로 세 살 나이에 죽은 문효세자의 묘도 들였다(『궁궐지』).
구보는 창의궁이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살았던 공간이라는 데 흥미를 갖는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1720~1758)의 부마가 돼 월성위에 봉해졌는데, 그가 추사의 증조부였다. 영조가 옹주 내외에게 창의궁을 내줘 한동안 ‘월성위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1758년 1월 4일 이곳에서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이 사망하자 화순옹주가 음식을 끊고 1월 17일 아사했다.
『영조실록』이 화순옹주 졸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옹주가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 하였다. 임금이 그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하였다. 정렬하다.”
창의궁 안에 옹주를 위한 사당을 마련하자 영조가 손수, “정성이 부족해서 돌이키지 못했구나, 네가 정절을 따랐음을 가상히 여긴다(誠淺莫回嘉隨貞)”는 여덟 자를 써서 내려 받들어 걸게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옹주 내외는 김한신의 선산이 있던 충남 예산 용궁리에 묻혔는데 이 지역에는 부부의 비극에 관한 비화가 전해져 온다. “옹주가 부친에게 올릴 곤룡포의 품을 재기 위해 남편에게 입혔다가 이를 목격한 사도세자가 격노해 김한신을 벼루로 내리쳐 죽게 만들었고, 남편을 잃은 상실감에다 오빠에 대한 원망이 더해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예산향토문화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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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를 총애해 수시로 창의궁에 들렀던 영조는 옹주 사후에도 황단과 육상궁에 전배한 후 귀궁하는 길에 창의궁에 들리곤 했다(『승정원일기』, 영조 49년 6월 8일 등).
옹주 내외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해 김한신의 친조카 김이주로 사후 양자를 삼았다. 판서이던 김이주가 죽자 정조가 품계를 의정부 좌찬성으로 올려 주었다. 후에 추사가 과거에 급제하자 이번에는 순조가 매우 기뻐했다. 1819년 윤4월 1일에 전교하기를 “월성위의 사손(祀孫)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실로 기쁘고 다행스럽다. 월성위 내외의 저건방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제문은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 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정조와 순조도 화순옹주의 비극을 전해들었을 것이며, 김한신 후손에게 빚을 진 심정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김한신의 10촌 형제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로서 정순왕후에 올랐다. 정순왕후의 덕으로 김한신의 손자이자 김이주의 아들인 김노경은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추사는 충남 예산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가 아들이 없던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상경해 창의궁에서 지냈다(『경주김씨대동보』). 이런 연유로 한때 통의동 백송 부근에 ‘추사 생가’라는 안내판이 세워지기도 했다. 정확히는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추사가 6세 때 써서 대문에 내건 ‘立春大吉(입춘대길)’ 네 글자를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선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추사는 창의궁에 살며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고증학과 북학을 계승했다. 24세이던 1809년 친부인 김노경이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했다. 이 사행에서 옹방강과 완원을 비롯한 청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배움을 얻었다. 이들과의 인연은 귀국 후에도 이어져 김정희의 학문 형성에 큰 보탬이 됐다.
추사의 동생 김명희도 명필이었고 보면, 월성위 집안에 서예 DNA가 있었을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가까운 서촌에 살던 천수경·장혼 등 중인 계급들이 1786년 결성한 글쓰기 모임인 ‘시사(詩社)’가 한양의 화제가 되자 추사는 1812년 옥계 바위에 ‘송석원(松石園)’ 현판을 새겨주었다. 송석원시사는 이 현판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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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양모인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됐고, 창의궁에서 안국동 남연군의 집으로 왕래하면서 자연히 그 아들 흥선군(1821~1898)과도 인연을 맺어 가르치게 된다. 대원군이 서화에 능했던 배경에 추사가 있었다.
1830년 김노경이 탄핵을 받아 유배형을 받았고, 1840년에는 추사도 윤상도의 옥사로 인해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기에 이른다. 9년 동안의 유배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2년간 창의궁에서 보냈다. 이 기간이 추사의 마지막 통의동 체류였다. 1851년 친구 권돈인의 예론에 동조했다가 다시 함경 북청으로 유배 갔고, 이듬해에 돌아와서는 과천 초당에서 봉은사를 오가며 만년을 보냈다.
추사의 자취가 담긴 창의궁은 추사 사후 50여 년 후인 1908년 7월 의소묘·문희묘의 신위를 매장하면서 폐궁돼 주택가로 바뀌었다. 둘레 5m, 높이 16m의 큰 백송이 있었으나 1993년 태풍 피해로 쓰러졌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송’이 사라지고 현재는 밑동만이 남아 창의궁 옛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백송터에는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예의 오묘한 경지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어서 봉황과 노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추사가 즐겨 쓰던 문장이다. 백송 터 바로 왼쪽에 ‘완당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회완재(懷玩齋)를 두었던 유천 이동익(1940~ )이 추사의 필의로 썼다. 구보는 만물이 인연으로 이어지며, 역사는 기억으로 승계됨을 확인한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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