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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입력 2026. 01. 22   17:47
업데이트 2026. 01. 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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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트빌리시와 태국 치앙마이 <下>

지친 여행자 반기는 따뜻한 미소
여독까지 풀어 주는 향긋한 커피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 머무는…

조지아 트빌리시의 와인이 ‘눈물’이라면
아편 대신 키운 치앙마이 커피는 ‘치유’
성곽과 해자를 따라 흐르는 자비
승려와 코끼리, 한데 어울려 돌보는 사람들
고품질 원두가 불러온 감각적인 카페들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 또 한 편의 성지로…

조지아 트빌리시와 태국 치앙마이는 얼핏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인다. 트빌리시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고, 치앙마이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도시다. 전혀 다른 대륙에 있는 두 도시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불린다는 점이다. 세계를 유랑하는 디지털 노마드는 특정 도시에 매료돼 오래 머물곤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쉴 자리를 찾는다. 유라시아의 교차로에서 8000년 와인의 향기를 지켜 온 조지아 트빌리시와 태국 북부 고산지대에서 ‘느림의 미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치앙마이가 바로 그곳이다.

 

치앙마이의 대표 투어상품인 코끼리 보호소.
치앙마이의 대표 투어상품인 코끼리 보호소.



여행자를 불러 모으는 콘텐츠의 도시

트빌리시와 치앙마이 두 도시 모두 디지털 노마드를 사로잡는 이유는 분명하다. 트빌리시는 저렴한 물가와 와인, 환대로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치앙마이는 고요한 사원과 카페문화, 친절한 미소로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다독인다.

 

치앙마이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을 지녔다. 1296년 란나왕국이 수도를 치앙라이에서 옮겨 오면서 탄생했다. 태국의 수도 방콕이 화려하고 번잡한 현대적 메트로폴리스라면 태국 북부의 중심 치앙마이는 성곽과 해자가 그대로 남아 과거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다. 

치앙마이의 매력은 ‘조화’다. 어디서나 보이는 도이수텝(수텝산)은 이 도시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 준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평온한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넓은 땅에는 해자를 따라 형성된 올드시티(Old City)가 있고, 그 안에 수백 개의 불교사원이 자리한다. 이른 새벽 스님들이 탁발 행렬을 이루고 시민들이 맨발로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도시가 품은 깊은 영성을 느낄 수 있다.


치앙마이성의 동쪽 문인 타패게이트는 여행자를 맞는 관문 역할을 한다. 문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면 전통 마사지 가게와 수공예 상점이 여행자를 반긴다. 치앙마이 공항 활주로 끝자락에 자리한 님만해민은 북부 커피 원두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감각적인 카페가 줄지어 있다. 도시 외곽의 예술가 마을 반캉왓은 치앙마이의 창의적 에너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예술적 영감과 치유의 시간을 얻는다.


치앙마이의 매력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빛난다. 과거 아편을 만들던 자리에 커피나무를 심고 노동의 대상이었던 코끼리를 보호하며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방식을 되살렸다. 태국의 다른 지역이 채찍질로 코끼리를 조련하는 관광을 유지한다면 치앙마이는 코끼리 보호소를 세워 방문객이 직접 바나나와 사탕수수를 먹이며 그들의 생태를 배우게 한다. 치앙마이의 보호소에서 여행자는 생명 존중의 감각을 되찾고 진정한 힐링을 경험한다. 

치앙마이 코끼리 보호소에선 코끼리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다. 이때 코끼리가 바나나를 들고 있는 사람의 손까지 입에 넣기도 한다. 놀라지 말자. 코끼리는 인간만큼 지능이 높아 입에 손이 들어온 순간 ‘아이코’ 하고 놀란 듯 얼른 손을 내준다.

 

 

치앙마이의 겨울은 쾌적한 날씨 덕분에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다.
치앙마이의 겨울은 쾌적한 날씨 덕분에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다.

 

대표적인 수공예품 우산을 만드는 보상마을 주민들.
대표적인 수공예품 우산을 만드는 보상마을 주민들.

 


아편에서 커피로: 삶을 바꾼 로열 프로젝트


치앙마이 사람들은 언제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 란나왕국 시절 이어진 전통 수공예가 지금까지 남아 우산 제작, 수공예 시장, 예술인 마을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비록 란나왕국은 사라졌지만, 그 문화와 기술은 살아 있다. 현재 태국의 유일한 왕실인 짜끄리왕조는 통일 이후 란나지역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대규모 개발사업을 했다. 빈곤한 북부 농가를 지원하기 위한 로열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로열 프로젝트는 치앙마이와 태국 북부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태국·라오스·미얀마 접경지대의 골든 트라이앵글은 한때 아편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고산족에게 커피와 대체 작물을 심게 하며 새로운 생계를 열어 줬다. 이 변화는 치앙마이를 세계적인 커피 도시로 바꿨다. 그중 대표적인 성공사례가 바로 아카족 마을에서 시작된 아카아마커피다. 고산 마을 출신 젊은이가 자신의 부족 원두로 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 지역의 고품질 원두와 세련된 인테리어로 치장한 카페들이 디지털 노마드를 끌어당긴다.


치앙마이 음식, 나눔과 환대의 미학

로열 프로젝트는 단순히 농업 개발로 끝나지 않았다. 질 좋은 재료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면서 치앙마이의 음식문화도 풍성해졌다. 깨끗한 로컬 재료와 전통 조리법이 만나 단순한 끼니를 넘어 란나의 역사를 전하는 예술이 됐다.

치앙마이 미식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칸똑’이다. ‘칸’은 그릇, ‘똑’은 낮은 원형 상을 이른다. 이 전통 식사는 북부식 소시지(사이우아), 튀긴 돼지껍데기(캡무), 각종 나물과 고기요리를 여러 접시에 담아 둥글게 차려 놓고 찹쌀밥(카오니여우)과 함께 나눠 먹는다. 과거 란나왕국에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던 상차림으로 지금도 잔치나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여행자는 칸똑을 통해 단순히 식사하는 것을 넘어 현지인과 온기를 나누는 환대를 경험한다. 이에 현지 요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여행자는 쿠킹 클래스에 참여하게 된다. 치앙마이에는 무려 80개 이상의 요리교실이 있어 쉽게 방문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치앙마이에선 현지 원두를 활용한 스페셜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필자 제공
치앙마이에선 현지 원두를 활용한 스페셜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필자 제공

 

해가 뜨기 전 도이수텝 입구에 가면 새벽 탁발을 나온 스님과 시주하는 시민들의 경건함을 마주할 수 있다.
해가 뜨기 전 도이수텝 입구에 가면 새벽 탁발을 나온 스님과 시주하는 시민들의 경건함을 마주할 수 있다.



란나의 축복, 치앙마이의 골든타임

치앙마이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건기인 11월에서 2월 사이다. 이 시기 치앙마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무더운 동남아의 모습과 다르다. 고산지대의 기후 덕분에 아침과 저녁은 서늘하고 낮에는 따듯한 햇살이 도시를 감싼다.

특히 1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약 15도로 가장 쾌적하다. 해자와 성곽이 둘러싼 올드시티를 산책하거나 님만해민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디지털 노마드의 모습은 치앙마이 겨울의 상징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치앙마이를 찾는다면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화전으로 불리는 전통 농업이 시작되면서 농부들은 수확 후 밭을 태우며 다음 농사를 준비한다. 산 전체를 화염으로 붉게 물들이고 동시에 엄청난 매연을 뿜는다. 분지 지형인 치앙마이는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도시 전체가 회색빛으로 변한다. 맑은 하늘을 기대한 관광객은 실망하고 주민들은 호흡기 질환에 시달린다. 매연은 바람을 타고 중국 남부까지 퍼져 외교 문제로 논의될 정도다. 숙소마다 공기청정기가 기본으로 설치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뜨거운 열기와 축제의 환희

본격적인 화전에 앞서 2월은 치앙마이의 생동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상쾌하다. 매년 2월이면 치앙마이의 대표 행사인 꽃축제가 열린다. 거리마다 화려한 꽃차 행렬이 이어지고 지역 예술가와 무용수들의 공연이 도심을 물들인다. 인근 보상마을에서도 우산축제가 열려 알록달록한 종이우산이 하늘을 채운다.

2월은 맑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도이수텝에서 열리는 트레일 러닝대회에 전 세계 트레일 러너들이 주목한다. 러너들의 거친 숨소리가 산골짜기를 채우며 도시 전체가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 찬다.


여행자를 품는 두 도시의 온기 

언뜻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깊게 살펴보니 두 도시는 닮았다. 트빌리시의 와인이 거친 흙더미 속에서 인내로 익어 간 캅카스의 눈물이라면 치앙마이의 커피는 아픈 역사를 딛고 고원에서 피어난 치유다.

조지아인이 술잔을 높이 들며 “가오마르조스(승리를 위하여!)”라고 외칠 때 그 안에는 침략을 이겨 낸 자의 긍지가 있고, 태국인이 “마이 뺀 라이(괜찮아요)”라고 웃으며 손을 내밀 때 그 안에는 타인의 실수까지 품는 자비가 있다.

이 모든 풍경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두 도시는 생김새 다른 여행자마저 따듯한 온기로 감싸안으며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가 된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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