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 서울 종로구 ‘경희궁’
경복궁 서쪽 종로구 신문로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이었지만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머물러 ‘서궐’이라 불렀다. 동쪽의 창덕궁·창경궁을 ‘동궐’로 표현한 데 견준 명칭이었다. 이곳의 지명인 신문로와 새문안은 돈의문(서대문)이 생기면서 속칭인 ‘신문(新門)’, 혹은 우리말 ‘새문’과 『눌재집』에서 보듯 한자음 ‘새문(塞門)’ 등으로 부르고 쓰던 데서 유래한다.
또 ‘오궁(五宮)골’로도 불렀다. 경희궁·인경궁·경운궁과 왕가의 제택 등 궁가(宮家) 5개가 모여 있었던 연유였다. 이 공간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현판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야주개(夜照峴)’와 ‘야주개 대궐’이라는 별칭도 얻었다(『사직서의궤』). 하나의 공간이 여러 이름으로 불린 것은 장소성이 그만큼 다의적이었던 까닭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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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광화문에서 신문로를 거쳐 경희궁을 향할 때마다 1906년 정월대보름날 이 길을 걸었던 이준 열사를 떠올리곤 한다. 순국하기 한 해 전 ‘탁지부 대신 이용익을 만나러 황토현(광화문 사거리)을 지나 서궐 흥화문으로 올라가다가 남쪽으로 뚫린 골목 오궁골로 들어섰다’는 기록이 『이준선생전』에 남아 있다. 길은 많은 사연을 품고 있고, 후세는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때의 시간을 짚어보게 된다. 선생은 이 길을 걸으며 생의 끝자락에 다다랐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이듬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무위에 그친 뒤 세상을 떠났다.
구보는 구세군회관에 다다르자 경희궁의 원래 정문인 흥화문이 이곳에 있었음을 생각한다. 정문을 정남(正南)이 아닌 모퉁이에 낸 까닭은 창덕궁도 그러하듯이 이궁으로서의 격식을 지킨 것이었다. 정문 안 공간이던 서울역사박물관 뜰 한쪽에는 왕궁의 상징인 금천교가 복원돼 있다. 개양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흥화문은 원래 위치인 것처럼 보인다. 궁 안에는 정전(正殿)인 숭정전을 비롯해 1500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의 화재로 절반이 타 버려 이듬해 재건했다(『궁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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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역사는 광해군이 부왕을 위한 새 궁을 기획하면서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소실돼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았다. 지금의 덕수궁 석어당 자리다. 광해군은 1608년 즉위하자 석어당을 경운궁으로 명명하고 궁궐 복구에 돌입했다. 경복궁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복구하지 않아(『광해군일기』, 9년 1월 18일) 정궁의 지위는 270여 년간 창덕궁이 누렸다. 1611년 10월 창덕궁을 복원해 이어했으나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라며 흉궁으로 여겨 두 달 만에 도로 경운궁으로 회귀했다.
1615년 광해군은 인왕산 남동쪽이 길지라는 승려의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여 사직단 주변에 인경궁(仁慶宮)을 짓기 시작했다. 사직동서부터 필운동·통인동·옥인동·수성동 등 지금의 서촌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였다. 그해 6월 11일 “정원군(광해의 이복 동생)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인 김일룡의 말에 따라 새문안에 있던 그의 집을 허물고 또 다른 궁궐 건축에 나섰다(『광해일기』, 9년 6월 11일). 이런 연유로 인경궁 공사는 지지부진해지고 1617년 경덕궁(慶德宮)이 먼저 완공됐다. 두 궁을 한꺼번에 지으면서 민가 수천 채를 허물고 8도에서 재목을 징수하는 한편 전국의 승군(僧軍)을 징발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속잡록』). 후에 숙종이 “경덕궁 승휘전의 담장을 수리할 때 사람의 뼈가 낭자하게 나왔다”고 언급한 『국조보감』의 1693년 기록으로 미뤄 매장터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막상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에게 이어졌다. 그가 곧 인조다. 결국 새문안 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인의 말은 틀리지 않은 셈이 됐다. 경덕궁보다 규모가 컸던 인경궁은 인조 때 해체돼 자취가 사라졌다. 170칸분 자재는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안국방에 궁가 100채를 짓는 데 사용됐고, 나머지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짓는 데 동원됐다(『궁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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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즉위 후 경덕궁에서 정사를 본 이래 여러 왕이 머물렀다. 특히 영조가 이 궁에서 오래 체류했다. 영조는 복구한 창덕궁 인정전에 다시 화재가 발생하자 경덕궁으로 이어했고(『영조실록』, 23년 10월 27일), 1747년 창덕궁에 천연두가 유행하자 세자(사도세자)를 경덕궁으로 옮기게 했다. 어린 세자가 어른들의 안부를 궁금해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선 가상히 여겨 즉시 경덕궁으로 행차한 일화도 있다. 그랬던 부자간 정이 ‘뒤주 속 죽임’으로 끝난 사실을 떠올리며 구보는 비감에 젖는다. 숙종과 경종이 이 궁에서 태어났고, 숙종과 영조·순조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정조와 헌종은 이 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1760년 영조가 궁명을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원종으로 추존된 인조의 부친 정원군의 시호 ‘경덕’을 피휘하기 위함이었다(『국조보감』).
궁궐의 지위를 누리던 서궐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돼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면서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됐다.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거나 이전됐고, 주변에 관사들이 들어서면서 궁역도 대폭 줄어들었다. 흥화문은 1932년 총독부가 떼내 장충동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썼던 것을 1988년 경희궁 복원 때 다시 가져왔다. 1946년 이곳이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돼 궁터는 더욱 줄어들었다. 1980년 서울고가 서초구로 옮겨가면서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됐다. 1984년 시민을 위한 공원 조성이 결정되면서 궁터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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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 키 큰 두 그루 괴목을 지나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뒤편 안산 자락을 반원형으로 돌다 보면 ‘용비천’이라는 샘터를 만난다. 자연 그대로의 맑은 광천수다. 궁에 청량감을 제공했을 것이다. 장락전 옆 누각 용비루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인경궁에서 시작해 경덕궁, 서궐, 야주개대궐, 경희궁, 경성중학교, 서울고등학교 등으로 바뀌어온 공간의 시간을 지켜봤을 괴목 앞 벤치에 앉아 구보는 경희궁이 복원된 덕분에 이곳을 스쳐간 여러 왕의 사연을 반추할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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