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살아 있는 무기체계 그 자체... 불타는 공성전 아닌 타는 목마름에 무릎 꿇다

입력 2026. 01. 14   14:50
업데이트 2026. 01. 1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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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 남프랑스 카르카손 : 중세 성벽도시의 원형을 보여주다 

1500년 거쳐 탄생한 이중 성벽 도시 
성벽 사이 넓은 공간 ‘살상지대’로 불려
13C 佛 남부에 퍼진 카타리파 신앙운동
교황청 이단 규정하자 북부 귀족 침공
한여름 긴 공방 이어가다 식수 고갈로 패해
십자군 이후 군사 가치 사라져 원형 보존

프랑스 남부 성벽도시 카르카손 전경. 사진=필자 제공
프랑스 남부 성벽도시 카르카손 전경. 사진=필자 제공


서유럽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간혹 낮은 구릉지에 우뚝 서 있는 멋진 성채(城砦)를 마주할 경우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성의 연원을 살펴보면 대부분 중세 시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 중세는 소규모 기사 군대가 주 전력으로 활약한 시기였다. 대규모 야지(野地)전투는 드물었고, 주로 공성전 형태로 충돌이 전개됐다.

공성전은 성채만 견고하다면 방어자가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다. 중세에는 권력과 힘을 지닌 왕은 물론 봉건영주도 누구나 경쟁적으로 영지 내 요충지에 웅장한 성채를 세웠다. 주변으로 기사와 일반 백성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성벽 도시가 형성됐다. 이런 중세 성벽 도시의 전형으로 꼽히는 유적이 바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의 카르카손(Carcassonne)이다.

오늘날 카르카손은 ‘이중 성벽의 중세 도시’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성벽은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중세 말까지 무려 1500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탄생했다. 카르카손은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이 프랑스 남부를 지배하면서 세운 군사 요새로 출발했다. 당시 남프랑스 핵심 도시 툴루즈와 지중해를 잇는 길목에 있던 카르카손은 자연스럽게 교역로이자 침입로가 됐다. 요지(要地)임을 알아본 로마인들이 이곳에 석조 성벽을 두르고 방어탑을 세웠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서고트족과 프랑크 왕국, 심지어는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까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고대 이래 전쟁의 도시였던 카르카손은 중세에 접어들어 현재와 비슷한 성벽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도시 전체를 둘러싼 3㎞에 이르는 ‘이중 성벽’ 구조다. 로마 시대에 그 축성 기원을 갖고 있는 내부 성벽은 초기엔 낮고 두꺼운 형태였으나 중세에 보강돼 최대 높이가 12~14m에 이른다. 가장 두드러진 광경은 12~13세기 ‘알비 십자군 전쟁(Albigensian Crusade)’을 전후해 8~10m 높이로 건설된 외부 성벽이다. 외부 성벽은 선진 축성술을 적극 적용해 기존 내성벽 외곽으로 도시 전체를 감싸는 원형으로 건설됐다. 높은 성벽에 더해 원뿔형 지붕을 덧씌운 탑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해 방어 기능을 보강했다.

수성(守城) 측면에서 압권은 두 성벽 사이 ‘살상지대’로 불린 약 20~30m 폭의 공간이다. 설혹 적군이 어렵사리 외부 성벽을 돌파하더라도 이곳에 갇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기에 내부 성벽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적군의 첫 공격을 외부성벽이 받아내고 전황에 따라 내부 성벽이 최후의 방어선 역할을 하는 구조다. 이는 중세 공성전 시 방어 기술의 요체로 이러한 측면에서 카르카손은 단순한 ‘성’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흡사 하나의 ‘살아 있는’ 무기체계처럼 설계된 요새였다.

이 성벽의 방어력이 가장 극명하게 발현된 것은 13세기 초 알비 십자군전쟁(1209~1229) 때였다. 당시 프랑스 남부에 널리 퍼진 카타리파(Cathars·‘알비파’로도 불림)라는 신앙 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한 로마 가톨릭 교황과 이를 명분 삼아 남부 지역 장악을 꾀한 프랑스 북부 귀족들이 대군을 이끌고 몰려왔다.

1209년 카르카손에서 추방되고 있는 카타리파 신자들을 그린 중세 그림. 사진=필자 제공
1209년 카르카손에서 추방되고 있는 카타리파 신자들을 그린 중세 그림. 사진=필자 제공


1209년 십자군은 카타리파의 주요 거점이던 카르카손을 포위한 채 공격했지만 이중 성벽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여름 뙤약볕에서 공성전이 이어지면서 성안 우물의 식수가 고갈돼 결국 도시는 항복하고 말았다. 카르카손의 패배는 성벽 방어 실패가 아니라 물 없이 사람이 버틸 수 없는 한계의 패배였다. 13세기 중엽 이후 카르카손은 프랑스 왕실의 직할령 요새로 변했다. 당연히 왕실 자금이 투입되며 도시 성벽은 더욱 보강됐다.

그 덕분에 카르카손 성벽은 마치 중세 공성전 방어기술의 ‘백과사전’과 같은 요소를 모두 갖추게 됐다. 성벽 위에서 병사가 몸을 숨기며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시설인 여장(女墻), 적군을 향해 활이나 석궁을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총안, 성벽 아래로 접근한 적군을 향해 돌이나 끓는 물을 투하할 수 있는 성벽 위 돌출 장치, 적군 공성용 무기가 발사하는 투사물의 성벽 충격을 분산하고 사각지대를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닌 총 50여 개에 이르는 원형탑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이는 다중(多重) 구조의 성문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다양한 실전(實戰)을 치르며 보강된 것이기에 카르카손을 난공불락의 요새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에도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을 텐데 어떻게 해서 카르카손 성벽은 중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알비 십자군 전쟁 이후 카르카손이 위치상 더 이상 최전선 요새가 아니게 됐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13세기 말~14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스페인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프랑스 왕국의 국경 방어선은 보다 남쪽인 피레네 산맥 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긴 세월 최전방 요새 도시였던 카르카손은 군사적 효용성이 급전직하한 후방 도시로 전락했다. 그 덕분에 중세 말 이래 카르카손에서는 이렇다 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에 대포 공격에 대비해 굳이 기존 성벽을 개조할 필요가 없었다. 훼손은 됐으나 원형은 남은 채 존속한 성벽은 19세기 중반 건축가 외젠 비올레르뒤크가 주도한 대대적인 정리 및 복원작업을 통해 현재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생나제르 대성당 내부. 사진=필자 제공
생나제르 대성당 내부. 사진=필자 제공


카르카손을 주목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단지 ‘전쟁의 도시’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도시’였다는 점이다. 특히 이곳에는 중세 알비 십자군 전쟁 시 살았던 카타리파의 애환이 깃든 유적이 상당수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카르카손에 살던 많은 주민은 도시에서 추방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다. 결과적으로 잔인한 토벌작전 끝에 카타리파는 사라졌고, 생존자들은 이단 종교재판에 넘겨져 온갖 고초를 당했다. 도시의 돌길과 골목, 성당과 우물에는 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도심 중앙에 자리한 생나제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이 도시가 단순히 군사 요새가 아니라 신앙과 일상이 교차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카르카손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단순히 보기에 그럴싸한 성벽 도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이중 성벽에다 수많은 방어탑, 성안의 성이라고 할 수 있는 콩탈성, 그리고 주거와 종교 시설까지 중세 요새 도시의 거의 모든 요소가 한 공간에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르카손은 로마 시대 성벽 흔적, 중세의 방어 기술, 근대의 복원된 모습까지 긴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가히 중세 성벽방어 건축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이내주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 및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이내주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 및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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