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을 담다
염원을 보다
누군가에겐 그리움의 땅,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다. 대한민국 동쪽 최북단 강원 고성군은 6·25전쟁의 여운이 가장 진하게 드리운 곳이다. 전쟁 중반부터 정전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고성은 전쟁 이후엔 많은 실향민이 자리 잡은 망향(望鄕)의 도시가 됐다.
애절함으로 가득한 고성에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남북 교류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면서 고성엔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후 부침이 거듭되며 활기는 한풀 꺾였고, 사람이 모이던 곳엔 세월의 무상함만 남았다.
이런 고성도 다시 한번 꿈을 꾼다. 언젠가 찾아올 통일. 분단국(國)의 분단도(道)인 고성 최북단을 걸으며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고로움과 통일을 향한 염원을 느낄 수 있었다. 글=맹수열/사진=한재호 기자
전쟁 상흔 따라… 충혼비 기념탑 곳곳에
차로 고성을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진읍에 마련된 ‘고성군 충혼비’가 대표적인 예다. 고즈넉한 도로 옆에 세워진 작은 공원 속 충혼비엔 누군가 놓고 간 꽃이 겨울바람을 맞아 말라 가고 있었다. 이젠 빛깔도, 향기도 사라졌지만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한 마음만은 그대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는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월남참전기념탑’과 ‘6·25한국전쟁참전용사공적비’도 같이 세워져 있다. 충혼비는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잠시 들러 호국영웅의 헌신을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쉼터로 자리 잡고 있다.
충혼비에서 더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건봉산이 나온다. 여기서부턴 진짜 ‘전방’이다. 실제로 건봉산은 6·25전쟁 당시 고성에서 손꼽히는 격전지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부터 정전협정 직전까지 이곳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과 16차례에 걸친 공방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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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넋 따라… 사찰 불탔어도 위패 오롯이
건봉산 중턱에 세워진 천년고찰 건봉사는 전쟁을 온몸으로 받아 낸 또 하나의 전적지다.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승려 아도에 의해 세워진 건봉사는 한국 4대 사찰이자 31본산의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124칸의 부속암과 642칸의 당우가 있었던 건봉사는 전쟁에 휩싸이며 ‘불이문’만 남긴 채 전소되는 비극을 겪었다. 무너진 건봉사 터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인 불이문은 지금도 생생한 색을 발하며 관람객을 맞고 있다.
사찰이 불타는 참사를 겪었음에도 건봉사는 부처의 가르침을 오롯이 실현하고 있다. 명부당을 빼곡히 채운 6·25 전사자 위패가 그것. 1300위에 달하는 위패를 모시며 호국영웅의 넋을 기리고 있는 건봉사는 호국불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봉산을 지나면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DMZ 평화의 길’이 시작된다.
평화의 길 따라… 탁 트인 동해 금강산 한눈에
시작점은 비무장지대(DMZ) 관광의 성지 통일전망대다. 동해 최북단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는 분단의 설움과 망향의 아픔을 달래고 통일의지를 다지기 위해 1983년 조성됐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을 지나 차로 한참을 올라가야 나오는 통일전망대는 통일전망타워와 옛 건물인 통일관, 종교시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타워.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 고지에 34m 높이로 세워진 타워는 DMZ의 ‘D’ 자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반 아파트 10층 높이에 달하는 타워의 최고층에 올라가면 통유리 너머로 탁 트인 동해와 북녘의 금강산을 볼 수 있다. 금강산 방향으로는 일출봉·채화봉·육선봉·집선봉·세존봉·옥녀봉·신선대 등 금강산 외금강 2000여 봉우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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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의 마음 따라… 고향 바라보며 분단 아픔 달래
바다 쪽으로는 해금강 앞 말무리반도와 현종암 등 여러 섬을 조망할 수 있다. 때마다 많은 실향민이 이곳을 찾아 고향 땅을 바라보는 것은 전망(展望)이 가진 힘 때문이다.
통일전망대를 운영 중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이런 이들을 위해 고배율 디지털 망원경을 마련, 보다 세밀하게 고향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전망대 기능을 타워에 양보한 뒤 통일관은 관람객의 쉼터로 변했다. 1층엔 ‘대한민국 최북단 식당’이란 타이틀을 가진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선 명태살 무침 같은 이북음식을 판다. 또 다른 전망 명소인 2층엔 카페가 있어 커피를 즐기며 북쪽을 바라볼 수 있다.
통일전망대 또 하나의 명물은 풍산개 해랑·금강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선물받은 풍산개 곰이의 새끼인 해랑·금강이는 2021년부터 쭉 통일전망대를 지키고 있다. 통일전망대 관계자는 “성견이 된 뒤로 관리가 힘들어진 것도 맞지만 통일전망대의 마스코트로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일전망대에는 기독교 교회와 대형 불상, 가톨릭 예수상 등 각 종교의 건축·조형물이 모여 있다. 종교 화합을 통해 남북 화합을 이루겠다는 의미다. 특히 이들 조형물의 시선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생생한 기록 따라… DMZ 박물관 전시 눈길
통일전망대는 한 해 평균 5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관광명소다. 특히 ‘DMZ 평화의 길’이 열리는 오는 4월부터는 더 많은 이가 방문할 것으로 기대된다.
통일전망대에서 다시 남쪽으로 1.5㎞ 내려오면 나오는 ‘DMZ 박물관’도 통일을 염원하며 고성을 방문한 이들이 꼭 찾아가 볼 명소다.
2009년 문을 연 DMZ 박물관은 DMZ를 주제로 6·25전쟁 전후의 모습, 군사분계선(MDL)과 DMZ가 갖는 역사적 의미, 계속된 군사충돌, DMZ의 독특한 자연환경 등 다양한 주제의 전시물·영상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은 남북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남북 합작다리’ 철원 승일교의 일부, 노동당사 등 분단과 관련된 시설을 구조물로 사용해 흥미를 더한다. 특히 독일 통일사례와 관련 자료를 따로 모아 전시, 통일에 대한 넓은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조국수호 발걸음 따라…
고성 최북단 통일전망대를 둘러보던 중 뜻밖의 길동무를 만날 수 있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해안을 따라 순찰 중인 우리 육군 장병들이었다. 하염없이 펼쳐진 길을 걸어가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겨울 아침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평화는 장병들의 노고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 이 평화의 끝에 많은 이가 바라는 통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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