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물랑루즈!’
낯익은 서사·익숙한 멜로디지만
예술적 짜깁기 듣는 순간 전율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사틴의 매력
시·청각 사로잡는 환상적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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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로비에서 서성이는 시간부터 이 작품은 관객을 붉은 망토 앞의 투우처럼 흥분하게 만든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공연장 안이 궁금해지는 공연은 흔치 않다. 출입구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보이는 무대는 호기심의 마지막 트리거다.
과연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서 “와아” 하는 탄성이 들려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대라니. 프랑스 레드와인을 무대 위에 오크통째 들이부어 놓은 듯하다. 막이 오르기 전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몇몇 배우가 느린 모션으로 무대 위를 오간다. 그 모습이 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우아하다. 마치 와인을 마시기 전 잔에 코를 대고 향을 맡는 순간 같다. 시작되기도 전 이야기에 취하는 기분이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시각으로 먼저 관객을 설득하는 작품이다. 객석 위까지 늘어진 붉은 드레이프(천 등을 늘어뜨리는 장식), 풍차와 코끼리 조형물, 2700여 개의 전구가 한꺼번에 숨을 몰아쉰다. 관객은 의자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1899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밤에 초대받은 손님이 된다. 물랑루즈의 세계는 그렇게 열린다.
‘물랑루즈!’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독특한 음악 방식이다. 흔히 주크박스 뮤지컬 중에서도 매시업 뮤지컬로 불리지만, 사실 뮤지컬 팬들에게도 낯선 개념이다. 장면에 들어가는 넘버가 여러 곡의 인기곡을 엮어 완성한 넘버라는 게 특징이다. 엘턴 존의 ‘Your Song(당신의 노래)’,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나쁜 로맨스)’,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깊은 수렁 속으로)’, 마돈나의 ‘Like a Virgin(처녀처럼)’, 시아의 ‘Chandelier(샹들리에)’ 등 세계적인 히트 팝이 한 장면 안에서 주렁주렁 이어진다.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 멜로디를 들으면서 빠르게 감정에 젖어드는 한편 익숙한 노래가 낯선 배열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감정의 낙차를 즐길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이미 성공한 히트곡을 사용하니 작곡가가 놀고먹을 것 같지만, 실제 작업은 나름 까다롭다고 한다. 각각의 곡은 이미 완결된 감성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기에 아무 장면에나 얹을 수 없다. 가사의 의미와 음악 분위기가 인물의 감정,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여러 곡을 이어 붙일수록 난도가 가파르게 올라간다. 아바의 히트곡으로 만든 ‘맘마미아!’ 같은 전형적인 주크박스 뮤지컬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음악은 플레이리스트의 나열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마디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짜깁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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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출발점은 2001년 개봉한 배즈 루어먼 감독의 영화 ‘물랑루즈’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과잉된 색채와 음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뮤지컬은 영화가 나온 지 18년 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지만, 단순히 무대화에 머물지 않았다. 영화 속 넘버에 더해 이후 발표된 팝 히트곡을 대거 끌어와 무대 언어로 다시 빚었다. 그 결과 뮤지컬 ‘물랑루즈!’는 영화의 기억 위에 서 있으면서도 음악적으로는 훨씬 현재형에 가까운 작품이 됐다.
이 화려한 세계의 중심에는 물랑루즈의 히로인 ‘사틴’이 있다. 김지우가 연기한 사틴의 첫 등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런 점에서 사틴이 부르는 ‘The Sparkling Diamond(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인물 소개를 넘어선다. 사틴은 자신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라고 노래한다. 값비싸고, 쉽게 가질 수 없으며, 모두가 탐내는 존재.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이 장면은 동시에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갑다. 자아 선언이면서 스스로를 향한 상품 설명서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사틴이 다이아몬드로 표현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이아몬드는 아름답지만 차갑고, 희귀하지만 활발하게 거래된다. 반짝이기까지 오랜 압력을 견뎌야 한다. 사틴 역시 무대 위에선 찬란하지만 그 빛은 누군가의 기대와 계약, 욕망 위에 놓여 있다. ‘The Sparkling Diamond’는 환호 속에서 시작되지만, 곱씹을수록 사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는지를 또렷이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틴을 향한 사랑은 4가지 얼굴로 나타난다. 이창용의 ‘몬로스 공작’은 가장 노골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그는 사틴을 원하고,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돼 있다. 불편하지만 솔직하다. 이상준의 ‘지들러’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틴을 붙잡는다. 물랑루즈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지키지만, 동시에 무대에 묶어 둔다. 홍광호의 ‘크리스티안’은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사랑이 요구하는 위험과 책임을 끝내 떠안지 않는다. 감정은 진심이지만 현실은 비어 있다. 최호중의 ‘로트렉’은 소유하지 않으려는 사랑을 택한다. 요구하지 않기에 제일 조용하면서도 가장 외롭다.
이 4개의 시선 한가운데서 사틴은 늘 선택보다 조건을 먼저 마주한다. ‘Elephant Love Medley(엘리펀트 러브 메들리)’에서 사랑은 달콤한 언어를 속삭이지만 동시에 위태로운 약속이 된다. ‘Only Girl in a Material World(물질적인 세상 속 유일한 여자)’는 사틴이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장면이다. ‘El Tango de Roxanne(록산의 탱고)’에서 크리스티안의 사랑은 질투와 분노로 뒤틀리며 폭발한다. 그리고 ‘Come What May(무슨 일이 있어도)’는 사랑이 계약도, 보상도 아닌 불확실한 희망으로 남는 순간을 보여 준다.
사틴은 1899년 파리에 서 있지만 정서는 지금에 가깝다. 꿈을 말하면서도 조건을 따져야 하고, 사랑을 원하면서도 생존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21세기적인 인물은 사틴이다. ‘물랑루즈!’는 화려함으로 시작해 사틴이라는 얼굴로 끝나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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