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Ⅲ : 아프리카-에티오피아 ①
‘253전 253승’ 전설 남긴 6·25 참전국…전쟁 후 참전용사 빈곤 내몰려
우리 정부 다양한 지원 지속…선조 헌신 아래 후손들 한국어로 꿈 키워
최근 많은 한국인이 동물의 왕국, 킬리만자로 백설, 빅토리아 호수 등을 경험하고자 아프리카로 떠난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내전, 테러, 풍토병, 빈곤’의 이미지가 더 크다. 더구나 아프리카의 독립전쟁, 내전,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을 두 달간 종단하며 답사한 전쟁유적지를 지면에 소개하고자 한다.
|
에티오피아는 성경 속의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기원전 900년 건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3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고, 단 한 번도 타민족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다. 동부 아프리카 문명을 꽃피웠던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황실 근위부대를 파병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지구촌 ‘가난의 대명사’로 전락한 땅,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지금 새로운 매력과 잠재력으로 한국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동아프리카 내륙국가로, 나일강 상류 및 해발 2000m 내외의 높은 산지에 걸쳐 있다. 수도는 아디스아바바, 인구는 약 1억3000만 명이다. 국토 면적은 110만㎢로 한국의 10배, 연 국민개인소득은 1272달러 수준이다. 약 13만8000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병제를 운용하고 있다.
|
100세 참전용사 생일 축하하는 한인 교민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인구 400만 명의 대도시다. 최근 중국 자본 유입으로 도시 전체가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솟아오르는 빌딩, 넘치는 자동차, 오가는 시민 표정도 밝다. 하지만 도시 변두리 서민의 삶은 고달프다. 낡은 주택 골목길에 앉아 할 일 없이 맴도는 청소년도 많다. 심지어 택시 창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는 아기 업은 아낙네도 가끔 보인다. 한인 식당에서 우연히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를 후원하는 교민을 만났다. 그들은 100세 생일을 맞은 노병의 가정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합류했다.
참전자 주택은 한국 정부가 지원해 개보수한 깔끔한 집이다. 참전용사 야일마(Yilma)씨는 장교였고, 삼형제 중 장남이었다. 1951년 파병된 형을 따라 그의 동생도 입대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동생은 1952년 양구지역 전투에서 전사했다. 대를 이어 한국에 충성한 가정이다. 지금은 막냇동생(89세)이 형을 보살피고 있다. 야일마 씨는 건강했지만 청력이 약해 동생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전했다.
에티오피아 군인이 기억하는 전쟁 참상
1951년 25세의 청년 장교 야일마는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한국의 전쟁터로 떠났다. 당시 살라시에 황제의 명령은 “자유가 없는 곳에 가서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 한국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뿐이었다. 황실 근위부대 최정예 군인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1개 여단의 파병부대는 전원 지원자였다. 거실의 노병 군복 사진에서도 자부심이 넘쳐났다. 주로 동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에티오피아군은 ‘253전 253승’의 전설 같은 신화를 남겼다. 전사 122명, 부상 536명의 고귀한 희생도 뒤따랐지만 단 1명도 적에게 포로가 되지 않았다. 연 참전 인원 6000명 중 오늘날 생존자는 50여 명. 거동이 가능한 분은 3~4명에 불과하단다.
야일마 씨의 회고담이다. “한국 추위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구나 차디찬 눈길에서 울고 있는 전쟁고아들을 볼 때 정말 가슴이 아팠다. 이에 부대 장교들이 봉급을 털어 고아들을 돌보기로 했다. 뒤이어 병사들까지 적은 월급을 모아 보육원 설립에 보탰다”고.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2개의 보육원을 운영했다.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참전용사 희생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야일마 씨는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격스럽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로 거듭나도록 도운 것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옆에 있는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
공산 정권과 참전용사의 극빈층 전락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신정부는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권력을 잡은 멩기스투는 소련·쿠바·북한과 가까워지며 토지와 기업을 국유화했다. 지식인, 학생 등 정권 반대 세력이 대대적으로 처형당했다. 이른바 ‘적색 테러 시기’다. 전국적으로 50만~100만 명이 학살됐다. “6·25전쟁 참전은 미 제국주의 편에 선 행동”으로 선언하고 참전자들은 순식간에 핍박 대상이 됐다. 연금지원 중단, 복지혜택 박탈, 자녀교육 기회 차단으로 참전용사 가정은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한국 파병 경험은 명예가 아니라 온 집안이 가난을 대물림받는 악형이 되고 말았다.
참전자 후손인 택시 기사 피시아(Fisiar) 씨는 스마트폰에 아버지 군복 사진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가난했던 1970년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원망하며 자랐다. 1991년 민주정권이 들어선 후에야 아버지가 6·25전쟁 참전용사임을 알았다. 택시 안에서 한국의 에티오피아 지원에 칭찬이 계속됐다. 아디스아바바에서 가장 좋은 의료시설도 한국 종교재단에서 건립한 M병원이란다. 참전용사 무료 진료로 아버지는 노년에 많은 혜택을 받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자신도 2021년 한국 보훈부 초청으로 방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호텔에만 머물러 너무 아쉬운 시간을 보냈단다.
한국행 꿈을 키우는 참전용사 후손들
아디스아바바의 ‘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전쟁기념탑, 박물관, 참전자 회관까지 있다. 이 회관은 이제 한국어학당으로 변신했다. 참전용사 직계 후손은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 매주 일요일 이 건물에는 그 후손들이 모여든다. 한국어를 배워 언젠가 선조들이 피 흘려 지켜준 한국 땅을 밟기 위해서다. 교실 안에서 “가갸 거겨 고교…”를 외치는 아이들은 흡사 어미 닭을 따라다니며 꼬꼬거리는 병아리 떼 같다. 교사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힌 선배들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떠나면 다음 언니가 선생님이 된다.
교사이면서 한국 이름을 가진 ‘단아(Dagumawit)’와 ‘홍나비(Meheret)’ 씨는 곧 한국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꿈의 나라 한국에 오기 전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검은 피부의 여자를 싫어한다는대요”라며 궁금해했다. 이처럼 전쟁으로 맺어진 한국과의 인연을 에티오피아 후손들은 학업으로 연결하려고 피눈물 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