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영화

전격전 질주의 끝은 승리 아닌 광기였다

입력 2026. 01. 09   16:15
업데이트 2026. 01.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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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티거(2025) 
감독: 데니스 간젤
출연: 다비드 슈터(전차장), 레오나르도 쿤츠(조종수), 세바스찬 우르젠도프스키(무전수), 로렌스 루프(포수), 요란 라이허(장전수)

獨 놀라운 기동력 비밀은 페르비틴 
약물 의존한 신화는 악몽으로 변해
철제관 속 무너지는 인간성·전우애
길 잃은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 다뤄

“독일군 기갑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기동력과 전투 지속력의 비밀은 바로 ‘페르비틴’이었다. 전차병들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3~4일 동안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약이 떨어지자 전차병들은 극도의 피로와 우울증, 환각에 시달렸고, 전차 안에서 얼어 죽거나 자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중, 백승만 지음, 동아시아 펴냄) 

전격전, 그 속도의 비밀

“전차의 엔진은 화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다.” 전격전의 창시자 하인츠 구데리안이 남긴 말이다. 그는 기동전은 속도가 생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구데리안은 쌍안경을 매고 전선을 누비며 지휘했다. 병사들은 신출귀몰한 그에게 ‘재빠른 하인츠’라는 별명을 붙였다.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자 세계는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목격했다. 이름하여 ‘블리츠크리크(Blitzkrieg)’, 전격전의 탄생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차와 기갑부대를 앞세워 적진을 순식간에 돌파하고, 공군이 지상군을 지원하며, 보병이 뒤따르는 입체적 작전. 속도가 곧 무기였다.

폴란드는 단 27일 만에 무너졌다. 1940년 5월 서부전선에서도 전격전은 위력을 발휘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마지노선을 우회해 아르덴 숲을 돌파한 독일군은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뫼즈강 교두보를 돌파한 후 프랑스를 횡단해 3주 만에 도버해협까지 다다랐다. 하루에 50~70㎞를 전진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추풍낙엽이었다. 잔존 병력은 덩케르크 해안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전차는 쉬지 않고 굴러갔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 놀라운 기동력 뒤에는 비밀이 있었다. 바로 작은 알약, 페르비틴(pervitin)이었다. 전차병들은 답답한 전차 내부에서 며칠씩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페르비틴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구데리안이 말한 속도는 전술적 천재성만이 아니라 약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 침공 작전 ‘바르바로사’를 개시했다. 독일군은 또다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이 끊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는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43년 가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밀리고 있었다. 전격전의 신화는 악몽으로 변했고, 약물 중독은 그 악몽에 더욱 깊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영화 ‘티거’는 ‘철제관’ 같은 전차 내부에서 벌어지는 심리 드라마다. 페르비틴을 복용하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사진 제공=아마존 프라임
영화 ‘티거’는 ‘철제관’ 같은 전차 내부에서 벌어지는 심리 드라마다. 페르비틴을 복용하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사진 제공=아마존 프라임

 

전차병들이 마주한 것은 광기

1943년 가을 동부전선. 독일군 티거 전차 한 대가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다리를 방어하며 후퇴하는 독일군을 엄호하고 있다. 전차장 게르켄스는 끝까지 버티다가 독일군 폭격기가 다리를 폭파하기 직전 후퇴 명령을 내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전차는 화염에 휩싸인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게르켄스는 불가능해 보이는 극비 임무를 받는다. 전선 사이 무인지대 깊숙한 곳에 있는 지하 벙커로 가서 하르덴부르크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이다. 중요한 정보가 적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5명의 전차병은 나치 군대가 지급한 각성제에 의존하며 점점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작전을 시작한다. 해골들이 널린 황무지를 통과하고, 지뢰밭을 조심스럽게 탐지하며 전진한다. 소련군을 피하기 위해 티거 전차를 잠수함처럼 물속에 잠수시키기도 한다. 작전 중 의문의 SU-100 소련 구축전차와 조우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하지만 무전수 케일리그가 전사한다.

적진 깊숙이 들어갈수록 병사들이 목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광기다. 독일군 한 장교는 병사들에게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집에 가두는 방법을 설명하며 “제국은 그 정도의 탄약조차 생산할 수 없어. 강제 노동 수용소 시대는 끝났어”라고 말한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공모자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대령을 만난 게르켄스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대령은 게르켄스에게 스탈린그라드에서 함께 겪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상기시키고 이윽고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는데….

영화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리게 한다. 구출 임무로 시작된 여정은 순식간에 도덕적 심연으로의 여정으로 변한다. 페르비틴으로 인한 희열과 공포, 그리고 점점 커지는 내면의 공허함 속에서 전우애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진다.

“우리는 철제관(티거 전차) 속에서 죽는다.” 한 병사가 내뱉는 이 대사는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비좁은 전차 내부, 소음과 추위, 그리고 쏟아지는 포화. 카메라는 병사들의 얼굴에 밀착해 그들의 공포와 고통을 담아낸다.

‘티거’는 전형적인 전쟁 영화가 아니다. 비상사태 속에서 죄책감, 무력감, 그리고 인간성 상실을 다룬 심리 드라마다. 안개와 연기로 뒤덮인 동부전선의 초원 풍경이 몽환적인 대조를 이룬다. 감독은 길을 잃은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을 타협 없이, 강렬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티거’ 중 페르비틴 복용 장면. 전차병의 손에 들린 용기에 ‘PERVITIN’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영화 ‘티거’ 중 페르비틴 복용 장면. 전차병의 손에 들린 용기에 ‘PERVITIN’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전차병의 초콜릿 ‘페르비틴’의 실체

“전차 초콜릿 먹어, 긴 밤이 될 테니.” 영화 속에서 전차장이 대원들에게 알약을 건네며 하는 말이다. ‘전차병의 초콜릿’으로 불렸던 페르비틴. 달콤한 별명과 달리 그 실체는 메스암페타민, 즉 필로폰이었다.

1938년 독일 제약회사 테믈러가 개발한 페르비틴은 처음엔 피로회복제로 민간에 판매됐다. 독일군 수뇌부는 이를 ‘기적의 알약’으로 여겼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3500만 정을 전선에 배포했다. 효과는 분명했다. 병사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솟아났다. 통증도 둔해졌다. 전쟁 말기 히틀러의 떨리는 손과 망상은 페르비틴을 포함한 각종 약물 복용 결과였다는 분석도 있다.

독일만 약물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은 병사들에게 2000만 정의 벤제드린을 지급했다. 미군도 전쟁 기간 5억 정에 달하는 암페타민을 생산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약물이 집중적으로 사용된 작전 중 하나였다. 일본군은 필로폰을 ‘돌격정(突擊錠)’이라고 불렀다. 출격 전 가미카제(자살특공대) 조종사들에게 이 알약이 섞인 정종을 먹였다.

2차대전은 약물 없이는 지속될 수 없었다. 페르비틴은 전쟁의 광기를 상징하는 물질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병사의 몸과 정신마저 소모품으로 여겼던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김인기 前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및 온라인편집국장
김인기 前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및 온라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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