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승리의 나팔소리… 통일독일 향한 벅찬 감동

맹수열

입력 2026. 01. 06   16:24
업데이트 2026. 01. 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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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 독일 통일전쟁의 서막 ‘보오전쟁’과 ‘쾨니히그레츠 행진곡’

‘대독일 vs 소독일주의’ 주도권 경쟁 
프로이센, ‘7주 전쟁’서 오스트리아 격파
독일 연방 해체되고 북독일 연방 승인
피프케, 승전 기념하기 위해 행진곡 작곡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서 선율 따와
경쾌하고 빠른 리듬으로 전쟁승리 축하

게오르크블라이브트로이가그린'쾨니히그레츠전투'.독일역사박물관소장
게오르크블라이브트로이가그린'쾨니히그레츠전투'.독일역사박물관소장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새로운 질서는 이른바 ‘빈 체제’로 정리된다. 프로이센은 라인란트(지금의 룩셈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사이) 지역과 베스트팔렌(룩셈부르크·벨기에와 독일 사이) 지역을 얻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 입지가 좋아 급속도로 발전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북부와 헝가리 왕국을 확보하면서 남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독일 마인강 북부 지역에서 프로이센 영향력이 커지면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책

이런 영향력의 변화는 1848년 5월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동안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주변 국가의 방해를 받아왔던 독일연방 통일 관련 논의에서의 갈등이 그것이다.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게르만족만의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팽팽하게 맞섰다.

투표에서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이겼으나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 당시 프로이센에는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와 참모총장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이 있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한 통일만이 영구적이고 유일한 방안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독일 통일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즉 ‘철(鐵)’과 ‘혈(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군대를 정예화하는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연방은 30여 개의 왕국 또는 공국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부상으로 북부 지역 대부분이 프로이센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노버, 작센 등 일부 친오스트리아 국가도 있었다. 1834년에는 영향력이 커진 프로이센이 연방 내 국가들을 대상으로 관세동맹을 체결했는데, 영향력이 막강해 연방 외 국가들도 참여할 정도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총리. 위키백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총리. 위키백과


프로이센의 덫에 걸려든 오스트리아가 먼저 선전포고

이때 덴마크와 독일연방의 국경 지역엔 홀슈타인·슐레스비히공국이 있었다.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일연방에 속해 있었지만 슐레스비히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 오스트리아는 두 나라 모두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일연방에 합류시키겠다는 일방적 제안을 한다. 이에 프로이센은 약속 위반이라며 군대를 동원, 홀슈타인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정면 도전으로 보고 1866년 6월 17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해서 ‘보오(普墺)전쟁’이 촉발됐다.

전쟁이 시작됐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로이센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쟁은 크게 보헤미아 지역(지금의 체코, 당시 오스트리아령)과 중앙의 하노버·작센 지역, 남쪽의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등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 전장은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고 있는 북부 지역을 독립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군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중앙은 프로이센이 손쉽게 점령했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 위키백과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 위키백과

몰트케, 쾨니히그레츠전투서 결정적 승리

핵심은 보헤미아 전장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과 연합해 21만 대군으로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레츠(프라하 동쪽 약 100㎞)에서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7월 3일 당시 참모총장 몰트케 장군이 직접 지휘한 28만 명의 프로이센군이 적지에서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에 압승을 거뒀다. 프로이센의 전사자는 2000명도 채 안 되는 데 비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약 1만3000명의 전사와 실종자에 2만2000여 명의 포로까지 발생하며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결국 7주 만에 오스트리아는 전장에서 이탈했으며, 보오전쟁을 ‘7주 전쟁’이라고도 부르게 됐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주도의 독일연방은 해체됐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연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독일지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배제됐다.

프로이센 군사혁신이 전장 지배

당시 몰트케 장군은 1835년 독일에서 처음 운행된 증기철도를 전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 독일이 5개의 철도망을 이용해 3개 야전군을 보헤미아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시켜 충분한 준비를 갖춘 반면 오스트리아는 1개의 철도망을 이용하다 보니 부대 전개 자체가 지연됐다. 부대를 장거리로 이동시켜 작전하면서 상·하급제대 간 통신대책이 큰 문제였는데, 몰트케는 철로를 따라 설치된 전신선을 이용했다. 전신을 통해 빠르게 상황 전파와 보고가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소총의 혁신적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사용한 전장식(前裝式)의 머스킷 소총은 짧은 유효사거리와 낮은 명중률이 늘 문제였다. 반면 프로이센은 신형 화기인 후장식(後裝式) 강선(라이플)소총, 이른바 ‘드라이제 소총’을 채택, 오스트리아군보다 훨씬 빠르고 멀리 사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몰트케는 지금의 독일군 뿌리인 일반 참모제도와 임무형지휘 체제를 가동해 전장에서의 전문성과 책임감, 융통성을 배가했다.

피프케의쾨니히그레츠행진곡악보. 필자제공
피프케의쾨니히그레츠행진곡악보. 필자제공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피프케의 쾨니히그레츠 행진곡

1866년 독일의 음악가 요한 고트프리트 피프케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을 만들었다. 이 곡의 선율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작곡한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호엔프리트베르크전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45년 폴란드 남서쪽 체코와 인접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보오전쟁의 결정적인 전투가 있던 쾨니히그레츠 지역과 가까운 곳이다.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작센연합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을 작곡했다. 연주는 경쾌하고 빠른 행진곡풍으로 벅찬 감동과 기쁨의 분위기가 잘 반영돼 있다. 중간에 트럼펫 단독 연주는 승리의 나팔을 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과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을 비교해 들으면 아주 비슷한 면이 많음을 느낄 수 있다.

피프케의 또 다른 행진곡으로 ‘프로이센의 영광행진곡’이 있는데, 이 곡도 아주 비슷한 선율을 띠고 있다.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은 후에 가사를 붙여 독일 군가로 널리 불리고 있다.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맹수열 기자 < guns13@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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