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자유와 저항…피아노 선율에 녹여낸 나라사랑

입력 2025. 12. 30   15:57
업데이트 2025. 12. 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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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쇼팽, 폴란드 독립을 노래하다

‘프랑스 혁명’ 영향 민족주의 촉발 
러시아로부터 독립 시도한 폴란드
대규모 러 군대에 밀려 봉기 실패
좌절된 ‘11월 혁명’에 낙담한 쇼팽
격정적 연습곡 이어 ‘폴로네즈’ 작곡
타국서 생 마쳤지만 심장은 고국 안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빈 체제가 가동되며 절대왕정체제로의 복귀인 반동체제로 돌아갔지만 자유와 평등, 민족과 독립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럽 민중은 동요했다. 그중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1830년 ‘7월 혁명’은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 폴란드에서도 혁명 움직임이 있었다. 1830년 러시아의 폭압에 항거하는 ‘11월 혁명’이 일어난 것. 폴란드는 179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됐는데 폴란드 중앙 및 동부지역 대부분은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에밀리아 플래터가 1831년 농민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묘사한 얀 로젠의 작품. 출처=폴란드 국립박물관
에밀리아 플래터가 1831년 농민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묘사한 얀 로젠의 작품. 출처=폴란드 국립박물관


폴란드 국민을 자극한 러시아의 강압통치 

잘 아는 것처럼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유럽 정상들은 1814년 빈에서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그 결과 작센지역을 점령한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포즈난 대공국(바르샤바 서쪽)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는 비엘리치카(바르샤바 남서쪽) 소금 광산 등 일부 지역을 가져갔고, 나머지 대부분의 폴란드 지역은 러시아가 지배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폴란드에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알렉산드르 1세가 폴란드 국왕을 겸임하는 체제로 변경하면서 폴란드 지배를 점차 강화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영향으로 그동안 지배를 받아오던 국가에서는 민족주의 의식이 촉발됐다. 폴란드에서도 러시아 억압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르 1세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빼앗고 검열을 강화했다. 특히 비밀 경찰조직을 운영해 폴란드의 자유주의적 반체제운동을 박해했다. 이에 폴란드에서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1월, 폴란드 사관학교 생도들이 중심이 된 봉기가 발생했다. 무장한 생도들은 러시아에서 온 대공의 궁을 습격하는 사건을 벌였다. 러시아 대공은 여장을 한 채 간신히 도피했고, 무장봉기 소식은 폴란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실패로 돌아간 11월 혁명, 독립의 불꽃 되다


임시정부를 세운 혁명세력은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해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 내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했다. 일부 귀족은 해외로 도피했으며, 농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831년 2월 약 11만 명의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해 혁명세력과 충돌했다. 일부 전투에서 혁명세력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대규모 러시아군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10월경 모두 진압됨으로써 결국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폴란드 국민이 사랑하는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은 빈에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비관하며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이때 쇼팽은 일기에 ‘오 신이시여,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설욕을 거절했어요. 모스크바의 죄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모스크바 사람이어서인가요?’라고 썼다고 한다.

 

프레데리크 쇼팽. 사진=위키백과
프레데리크 쇼팽. 사진=위키백과


쇼팽, 11월 혁명을 노래하다

쇼팽은 1831년 9월 파리로 가던 중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체류할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조국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낙담해 작곡한 것이 ‘피아노 연습곡 Op.10, No.12’다. ‘혁명(Revolutionary)’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이다. 이것을 쇼팽이 붙인 것은 아니다. 혁명 시기를 감안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Op.10의 연습곡들은 모두 12곡으로 1829년부터 1832년까지 작곡돼 1833년 출판했고, 프란츠 리스트(1811~1866)에게 헌정했다. 2분이 조금 넘는 곡으로, 연주 내내 아주 거칠고 격정적인 느낌을 준다. 혁명 전야의 긴박감과 폴란드 전역에서 러시아군에 진압당하는 참담함을 토해내는 듯하다.

리스트는 헝가리의 민족·애국적 작곡가로 지금도 헝가리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음악가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에 있는 공항도 ‘부다페스트 페렌츠 리스트 국제공항’으로 부르고 있다. 쇼팽과 리스트는 파리에서 만나 서로의 음악에 깊은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당시 쇼팽은 어려운 시기였는데, 리스트는 그를 위해 기꺼이 멘토 역할을 하면서 음악적 성장을 도왔다. 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은 다르지만 그들은 서로를 인정했다. 쇼팽이 죽었을 때 리스트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장송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의 피아노곡 ‘군대 폴로네즈’

쇼팽은 바르샤바 외곽 젤라 조바블라 지역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해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정착하면서 죽을 때까지 작곡 및 연주활동과 피아노 교습을 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 39세에 짧은 삶을 마감했다. 사인은 결핵에 의한 합병증이지만 많은 논란도 있다.

그는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심장은 유언에 따라 폴란드로 옮겨져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교회 기둥에 안치됐다. 쇼팽은 대부분 피아노 독주곡에 전념했으며, 그의 피아노 연주는 매우 섬세하고 깊이가 있었다. 음악 대부분은 폴란드 민요와 정서가 많이 반영된 매우 서정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쇼팽이 프랑스에 머물면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작곡한 곡이 더 있다. 1838년 작곡한 ‘폴로네즈(Polonaises), Op.40, No.1, No.2’다. 폴로네즈는 ‘폴란드의’라는 뜻으로, 폴란드의 전통 춤곡을 기반으로 한 기악곡 형식을 뜻한다. 바르샤바에서 나고 자란 쇼팽은 비록 몸은 타국에 있었지만 늘 조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폴로네즈, Op.40’은 2곡으로 구성됐는데 ‘No.1’은 장조곡으로 ‘군대 폴로네즈’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반면 ‘No.2’는 단조곡 특성이 반영돼 비장하고 고통스러운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9세기 유명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시테인은 첫 번째 곡이 ‘폴란드의 영광’, 두 번째 곡은 ‘폴란드의 비극’을 상징한다고 표현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은 쇼팽의 ‘군대 폴로네즈’를 매일 방송하면서 국민의 애국심과 나치에 대한 저항 의지를 일깨웠다.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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