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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위해 손 잡은 군·소방... 군 서북도서 생명의 하늘 길 열다

입력 2025. 12. 24   16:31
업데이트 2025. 12. 2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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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핫라인 벨 울리면 
메디온 20분 내 이륙

올해 인천 서해 5도의 하늘은 유난히 흐렸다. 검푸른 먹구름이 하루가 멀다고 섬 전체를 집어삼켰고, 거센 바람까지 수시로 몰아쳤다. 섬에서 발생한 환자들에게 악기상은 ‘생명의 위협’과도 같다. 강풍 구름벽을 뚫고 섬으로 갈 구조헬기가 없어서다. 서북도서 군사제한구역은 민간 구조헬기 비행이 어렵기도 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비행을 포기하던 절망적인 하늘은 군과 소방이 손을 맞잡아야만 했던 가장 절실한 이유가 됐다. 군 의료후송헬기 KUH-1M 메디온은 군사제한구역 비행이 가능한 데다 강풍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중량을 지녔다. 군 헬기가 서북도서 응급환자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도록 ‘군·소방 협력 모델’을 만든 건 다름 아닌 현장의 일선 요원들이었다. 지난 23일 국군의무사령부(의무사)에서 그 주역들을 만나 빛나는 성과와 긴박했던 사투의 기록을 들었다. 글=김해령/사진=이경원 기자

지난 23일 국군의무사령부에서 응급의료헬기 운용 관련 민·군 협력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23일 국군의무사령부에서 응급의료헬기 운용 관련 민·군 협력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군 헬기로 민간인도 살릴 수 있습니까?” 절실함이 만든 물꼬 

생명을 위한 군과 소방의 협력은 현장에서 28년간 발로 뛴 베테랑 소방관의 절실함에서 시작됐다. 인천소방본부 소속 안옥배 소방경은 서북도서의 열악한 이송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범부처 응급의료헬기 운영기관 컨소시엄에서 의무사 의료종합상황센터 남소윤 육군소령을 만났다.

당시 컨소시엄에서는 우리 군의 의무후송헬기 운용 현황이 화두였다. 군은 2023년부터 서북도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헬기 후송을 시작해 실전 경험을 쌓아온 터였다. 안 소방경은 군 헬기가 서북도서의 ‘골든아워’를 지켜줄 해답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고민 끝에 남 소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군 헬기로 민간인도 이송이 가능합니까?”

 

이 질문 하나가 서해 최전방 응급의료 체계를 바꾸는 시작점이 됐다. 이렇다 할 종합병원이 없는 서해 5도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신속히 육지로 이송해야 하지만 군사제한구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민간 헬기 이송은 한계가 있었다.

군사제한구역 내 지도와 정확한 목적지 좌표 등 보안 정보는 오직 군만 가지고 있다. 민간 헬기가 비행하려면 해당 지역을 잘 아는 군 항법사가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항법사를 기다리고 이륙하기까지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군사제한구역이 아니더라도 기상이 나쁘거나 다른 임무에 투입되면 대안이 없었다.

남 소령 역시 이런 현장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서북도서는 해무가 짙어 몇 분 전까지 출동할 수 있었다가도 금방 상황이 나빠지는 곳으로, 환자 상태가 악화하는 걸 보면서도 헬기를 띄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군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민간 헬기는 접근이 어려운 지역도 군 헬기는 가능하기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기관은 지난 3월 군 헬기를 투입해 서북도서 응급진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측은 핫라인(직통전화)을 구축하고, 합동 교육·훈련을 통해 실전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국군외상센터에서 의료진이 응급의료처치 훈련을 하고 있다.
국군외상센터에서 의료진이 응급의료처치 훈련을 하고 있다.

 

초속 20m 돌풍 뚫고 날아온 ‘생명의 날개’

협약의 가치는 금세 증명됐다. 체결 이틀 뒤인 3월 27일, 핫라인 벨이 울렸다. 백령도에서 발생한 급성 충수염(맹장염) 환자였다. 충수염은 진단과 수술의 골든아워를 놓치면 중증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질환이다.

처음 민간인 후송 임무 조종을 맡은 육군의무후송항공대 김건우(대위) 조종사는 “야간에 의료종합상황센터로부터 작전 투입 지시를 받고 기상을 확인해 보니 평균 풍속 35노트(초속 18m), 순간풍속 40노트(초속 20.5m) 이상 돌풍이 불고 있었다”며 “쉽지 않은 비행이 예상됐지만 환자의 위급함을 들은 터라 망설임 없이 헬기에 탑승했고, 무엇보다 이착륙 때는 바람에 헬기가 밀릴 수 있어 온 신경을 집중했다”고 회상했다.

메디온은 조종사 2명, 응급구조사 2명, 전문의 1명, 정비사 1명 등 6명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동승했던 권현빈(상사) 응급구조사 역시 당시의 떨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권 상사는 “환자를 태우고 돌아오며 밖을 경계해야 하는데, 보이는 게 바다밖에 없었다”며 “더욱이 헬기 안은 진동과 울림이 커서 환자 상태를 살피기가 쉽지 않았지만, 베테랑 조종사를 믿고 생체 징후 파악에 몰두했다”고 떠올렸다.

첫 번째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군 헬기는 해군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 안착했고, 환자는 대기하던 구급차로 인하대학교병원에 이송돼 무사히 치료를 마쳤다. 그 뒤로도 핫라인은 여섯 차례 더 울렸다. 우리 군은 △50대 뇌졸중 환자(10월 19일·대청도) △60대 폐암으로 인한 호흡곤란 환자(10월 22일·백령도) △80대 뇌경색 환자(11월 2일·백령도) △일산화탄소 중독 의심 증상으로 의식을 잃은 80대 환자(11월 18일·연평도) △의식변화와 흑색변 현상이 있던 60대 환자(11월 18일·백령도) △80대 폐부종 환자(12월 5일·백령도) 등 서북도서 민간인을 육지로 옮겼고, 소중한 생명을 지켰다.

군은 서해 5도 민간인·장병 응급환자 대응을 위해 2028년께 백령도에 비행기지를 새로 설치, 메디온을 상주시켜 서북도서 응급의료 안전망을 더욱 공고히 할 방침이다.

응급구조사가 환자를 결박한 뒤 헬기로 복귀하고 있다.
응급구조사가 환자를 결박한 뒤 헬기로 복귀하고 있다.


20분의 기적 속 담긴 치밀함 

군 헬기가 이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치밀한 검토 과정이 녹아 있다. 인천소방본부는 소방헬기뿐만 아니라 해양경찰과 닥터헬기 등 범부처응급의료헬기 자산을 모두 검토한 뒤 각 기관 헬기가 제한되는 구체적 사유를 의료종합상황센터에 전달한다. 의료종합상황센터는 원칙에 따라 모든 기관의 제한 사유를 검토한 뒤 최종 판단을 내린다.

남 소령은 ‘의료판단-후송결정-출동지시’가 하나의 흐름으로 동시에 진행돼 불필요한 지연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분 내 이륙을 원칙으로 하는데, 평균 5분 안에 이뤄진다”며 “별다른 의학적 이견이 없고 항로와 기상 이상이 없으면 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선 대통령 헬기가 떠 있어도 조정해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체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남 소령은 이 시스템이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달걀로 바위 치기’에 비유했다. 남 소령은 “처음에는 서북도서 임무 추진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현장의 필요성을 지속 설득했고, 결국 지휘관들이 공감했다”며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지금의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이 가능했다”고 부연했다.

군과 소방의 꾸준한 합동훈련도 도움이 됐다. 이들은 함께 훈련하며 통신 절차와 공통 용어, 역할 분담이 사전에 충분히 숙지됐다. 실제 상황에서 불필요한 혼선 없이 즉각적인 협력이 가능했던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다.

육군의무후송항공대 김보람(전문경력관 가군) 조종사는 합동훈련은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훈련이 곧 생명으로 이어진 사례라고 평가했다.

2023년 11월 서북도서 군 환자 대상 첫 헬기 후송을 담당한 그는 “합동훈련은 형식적인 훈련을 넘어 실무자들이 실제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어떤 요소가 제한 사항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완벽한 수행을 목표로 하기보다 같이 임무를 수행해 보고 발생하는 문제를 공유하며 개선해 나가자는 인식으로 훈련에 임해왔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제 임무 수행 시 시행착오를 줄이는 동시에 안정적인 후송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군대로 나아가다

이번 협력 모델은 최근 ‘2025 정부혁신 왕중왕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군 내외로 큰 인정을 받았다.(본지 12월 9일 자 2면 참조) 그렇지만 이들에게 가장 큰 훈장은 환자가 무사히 치료받고 회복했다는 소식이다.

“환자 결과가 좋았던 건 환자의 운에 우리의 노력이 아주 조금 더해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지켜내지 못한 환자들은 지금도 이름과 계급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지금도 환자를 태우고 날고 있는 우리 헬기가 안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남 소령의 말에는 굳건한 사명감이 배어 있었다.

이 순간에도 우리 장병들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험난한 서해의 하늘 아래서 그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지막 희망’이 되기 위해 엔진을 예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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