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반동체제에 반대…프랑스 7월 혁명과 2월 혁명
나폴레옹 전쟁 실패로 절대왕정 ‘회귀’
언론 자유 금지·하원 해산·선거 제한
‘7월 칙령’ 또다시 시민 반란 확산시켜
1848년 군중에 총격, 2월 혁명으로…
佛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
작품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 Op.15’
7월 혁명 10주기에 거리 행진하며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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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의 실패는 곧 구체제, 즉 절대왕정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빈에서 모인 유럽 정상들이 이를 합의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퇴진 이후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왕위에 복귀한 루이 18세(1755~1824)는 초기에 국민 여론을 의식한 듯 혁명 당시 성립된 제도를 존속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온건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말기에는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권력을 차지하고, 그의 조카가 습격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시 절대왕정체제로 전환했다.
프랑스 샤를 10세의 폭정, 국민들의 혁명정신을 자극
1824년 루이 18세가 죽자 왕위를 계승한 샤를 10세(1757~1836)는 절대왕정의 전제군주식 통치를 강화했다. 즉위 후 강경하게 밀어붙인 두 가지 정책이 큰 불만을 샀다. ‘성찬례를 모독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것과 ‘1789년 혁명과 나폴레옹 제1제국에 의해 몰수된 재산에 대한 재정적 배상 조항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혁명의 적으로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지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가톨릭 전통의식을 부정할 경우 신성모독법을 적용한다는 것으로 종교의 자유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법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의 공화정 시기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불만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왕립 근위대를 사열할 때면 관중이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자를 벗어 예의를 표하는 것이 전통인데, 1827년 4월 16일 사열식에서 관중이 이를 거부했다. 또 정부 비판이 거세지자 신문 검열을 강화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하원에서 이를 거부함으로써 정부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다. 급기야 시민들의 자발적 방위 조직인 ‘국민위병’을 강제로 해산해 시민을 경악하게 했다.
1830년 7월 혁명과 ‘7월 왕정’
특히 1830년 3월에는 하원 다수당이 국왕과 내각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했다. 샤를 10세는 내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의원과 시민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의원들이 국왕에게 청원서를 내기도 했으나 샤를 10세는 이를 무시했다. 오히려 샤를 10세는 의회 해산과 함께 선거마저 연기했다가 7월 시행했는데,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왕과 내각은 위기를 느꼈다. 이에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25일 칙령(‘7월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언론의 자유를 금지하고, 하원 해산과 함께 상업 중산층의 선거 참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원과 시민이 들고일어났고, 전국적으로 폭동과 반란이 확대됐다. 샤를 10세는 군대를 투입해 시민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강경 진압을 시도했으나 수적으로 정부군이 열세였다. 게다가 일부 정부군은 시민군에 가담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특히 당시 정부군이 알제리 원정을 떠난 상태여서 정부 대응이 제한됐다.
결국 7월 29일 혁명은 성공했다. 그래서 7월 27~29일 3일간을 ‘영광의 3일(Trois Glorieuses)’이라고 부른다. 샤를 10세는 폐위돼 영국으로 도피했고, 절대왕정과 귀족체제가 붕괴됐으며,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루이 필립(1773~1850)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입헌적인 7월 왕정이 수립됐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료된 지 15년 만에 다시 절대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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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혁명 영향과 새로운 혁명의 조짐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고,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폴란드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으나 독립에는 실패했다. 7월 왕정이 비록 입헌군주제라고는 하지만 선거권은 아직 매우 한정됐다. 게다가 1840년대에는 보수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됐다. 산업혁명 영향으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상공업 계급과 노동자가 불만을 품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특권층인 ‘금융 귀족’, 즉 은행가, 재벌, 탄광 및 철광석 광산과 삼림 소유주, 그리고 토지 소유주 등은 루이 필립을 지지했으나 노동자와 평민, 특히 별다른 재산이 없는 계층은 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는 결국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의 참정권 박탈로 이어져 1848년까지 전체 인구 중 약 1%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들은 참정권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무시됐고, 1846년에는 재정 위기와 흉작,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진압되기도 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마침내 프랑스 제2공화국 선포
당시 프랑스에서는 정치 집회와 시위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산층 활동가들은 모금 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연회 운동은 정부의 집회 제한을 우회하고 정권에 대한 대중의 비판을 합법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했다. 1848년 2월 22일에도 이러한 연회를 계획했으나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강제 해산했다. 이튿날 카푸신대로 외교부 청사 앞 시위에서는 정부군이 군중에 총격을 가해 52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민들은 그들의 죽음 앞에 인내하지 않았고 도시 전체가 반정부, 혁명세력이 돼 들고 일어났다. 결국 루이 필립과 왕비는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당시 반정부 세력은 바스티유광장에서 불에 타는 왕좌를 보며 이렇게 썼다. “파리 시민이 유럽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 자유, 평등, 우애, 1848년 2월 24일”, 이러한 결과로 결국 2월 25일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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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 대교향곡에 혁명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마음 담아
이 시기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1803~1869)는 7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Grande symphonie funebre et triomphale), Op. 15’을 작곡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7월 혁명 10주기를 맞아 파리 바스티유광장에 기념비를 세우고, 7월 왕정에 도움을 준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추진했다. 베를리오즈는 7월 28일 열린 기념식 행렬에 200여 명의 마칭밴드를 이끌고 행진하면서 초연을 했다.
베를리오즈는 낭만주의 시대 프랑스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작곡가다. 고전주의가 강조하는 형식을 과감히 탈피해 기존 틀을 깨는 구조와 형식을 사용한 음악가로 유명하다. 특히 오케스트라에 온갖 악기를 총동원해 대규모로 연주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은 전체 3악장의 곡으로 35분 정도 연주된다. 혁명에서 희생된 이에 대한 장송과 혁명을 성공시킨 이들의 승리의 분위기를 반영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1악장은 장송행진곡으로, 혁명의 희생자를 기념비로 운구하는 내용이 반영돼 비교적 완만한 행진곡 템포의 리듬을 유지하며 이로 인해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2악장은 추도의 곡으로 희생자에 대한 추도를 담은 곡이며, 전편에 걸쳐 테너 트롬본의 독주가 펼쳐진다. 3악장은 승리의 찬가로, 전체가 강력한 호흡으로 승리를 힘차게 부르짖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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