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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따라간 길에서, 꽉 찬 느낌표를 만나다

입력 2025. 12. 04   16:37
업데이트 2025. 12. 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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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맛의 동네, 방이동

백제 몽촌토성 산책로 따라 걷다
호수·숲길 어우러진 올림픽공원으로
켜켜이 쌓인 역사와 중산층의 여유
전통시장 옆 ‘힙한’ 송리단길 형성
동네 주민과 나들이객
일상과 여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먹고 마시고 쉬고 구경하고…
어디를 가든 실패 없는 즐거움

 

올림픽공원 몽촌호. 사진=필자 제공
올림픽공원 몽촌호. 사진=필자 제공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하면 떠오르는 건? 방이동 주민이 아니라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외지인이라면 바로 옆 잠실로 가지 굳이 방이동으로 향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방이동은 올림픽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동네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됐고, 그때 조성된 올림픽공원은 우리나라 공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이른바 ‘송리단길’은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성지다. 맛집도, 멋집도 많다.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방이전통시장에선 옛날식 통닭이 기름 뚝뚝 흘리며 튀겨진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선진국이지만, 방이동은 이미 20년 먼저 선진국이 됐다. 중산층의 여유와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방이동은 보는 재미, 먹는 재미, 걷는 재미 모두를 보장한다. 서울 좀 안다는 사람, 맛집 정보에 환한 사람은 방이동을 놓쳐선 안 된다. ‘찐여행’ 고수는 방이동을 걷는다. 골목마다 숨겨져 있는 최고의 카페와 빵집을 순례한다.

 

방이전통시장 입구. 사진=필자 제공
방이전통시장 입구. 사진=필자 제공


오랑캐를 무찌른 방이동 사람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길목에서 방이동 사람들은 청나라 군을 막아 냈다.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가 방이동 지명의 뿌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꽃다울 방(芳)’ ‘어린싹 이(荑)’로 바뀌며 지금의 방이동이 됐는데, 당시 논밭이었던 전원 풍경을 담은 이름이기도 하다. 백제시대 몽촌토성이 바로 방이동에 자리하고 있어 역사와 현재가 한 층에 포개진 느낌이 난다. 토성길을 걸으며 흙냄새를 맡는 순간 서울 한복판에 이런 풍경이 있었나 싶은 기분 좋은 배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방이동이 속한 송파구는 서울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은 구이고 중산층 비율도 높다. 이런 곳의 상권은 자연스럽게 ‘검증된 맛집, 검증된 브랜드, 검증된 취향’만 살아남는다. 그래서 방이동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실패 확률이 거의 없다. 한적한 골목엔 오래된 방이전통시장과 순댓국집이 있고, 반대편에는 송리단길이 감각적인 외식문화를 이끈다. 고르게 분포된 인구와 견고한 지역 살림이 만들어 낸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다채로운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올림픽공원의 명물 ‘왕따나무’. 사진=필자 제공
올림픽공원의 명물 ‘왕따나무’. 사진=필자 제공


방이동이 특별한 이유

방이동의 진짜 매력은 일상과 여가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는 것이다. 방이동으로 나들이를 오는 젊은이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섞여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가족 단위 손님과 젊은 연인이 반반씩 섞여 삼겹살을 굽는 식이다.

몽촌토성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올림픽공원이 나타난다. 올림픽공원은 당시 파격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서울숲, 월드컵공원 등 좋은 공원이 전국적으로 흔하지만 1980년대 서울은 콘크리트로 가득한 회색빛 도시였다. 호수와 녹지, 숲길로 구성된 올림픽공원은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환상의 공간이었다. 올림픽공원 근처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방이동 주민들은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올림픽 때 조성된 측백나무 한 그루는 ‘왕따나무’로 불리며 지금도 많은 이의 카메라를 끌어당긴다. 특히 해가 지기 전후 나무 뒤로 붉게 번지는 노을은 SNS에서 이미 유명 스타다. 서울 도심에서 이런 고즈넉한 풍경이 가능한 곳은 많지 않다.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토성길→올림픽공원 호수→세계평화의 문→공원 외곽 순환길 코스는 5~7㎞ 정도로 초급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루트다. 자전거를 빌리면 토성 주변의 흙길과 공원의 넓은 잔디길, 호숫가 데크를 자연스럽게 이어 즐길 수 있다.


방이동을 대표하는 맛집 ‘방이 최고집 손칼국수’. 사진=필자 제공
방이동을 대표하는 맛집 ‘방이 최고집 손칼국수’. 사진=필자 제공


로컬과 국제적 감성의 공존

방이동이 ‘먹는 재미가 있는 동네’인 건 분명하다. 오래된 시장과 새롭게 뜬 상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먼저 방이전통시장은 동네 주민들의 삶이 묻어 있다. 재래시장 특유의 따뜻한 정서가 있고, 서민 음식과 간단한 먹거리가 촘촘하게 배치돼 있다. 국숫집, 전집, 과일가게, 정육점이 이어지며 ‘살기 좋은 동네’의 기본기를 잡아 준다. ‘청와옥’ 순댓국은 방이동의 자랑이다. 국물이 묵직하고 속이 꽉찬 순대가 들어 있어 ‘전국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순댓국’으로 통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데도 음식은 늘 맛있고, 서비스도 흠잡을 데가 없다.

떡볶이 전문 유튜버가 선정한 5대 떡볶이 맛집 중 하나인 ‘빨간부산오뎅’ 떡볶이는 꾸덕한 고추장 양념과 쌀떡의 조화가 문화재급이다. 이 집의 또 하나의 시그니처인 콩나물이 올라간 어묵도 꼭 먹어 볼 것. ‘방이 최고집 손칼국수’는 걸쭉하면서도 시원한 국물과 손으로 뽑은 면발의 식감이 좋아 점심시간엔 서두르지 않으면 웨이팅을 각오해야 한다.

조금만 걸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송리단길은 세련되고 국제적인 외식의 거리다. 멕시코 음식점 ‘갓잇’, 규동 전문점 ‘단디’ 같은 곳은 후기만 1만 개가 넘는다. 수많은 맛집 중 2곳만 예로 들었을 뿐이다. 송리단길에서 새로 개업하는 식당들도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이런 무시무시한 격전장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건 웬만한 자신감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어서다. 중산층이 두꺼운 송파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진짜 맛집’이란 의미다. 방이동엔 소박한 맛과 트렌디한 맛이 나란히 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실패하기가 쉽지 않다.


방이동에 조성된 ‘송리단길’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방이동에 조성된 ‘송리단길’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마실 곳, 쉴 곳, 구경할 곳이 균형 잡힌 동네

토성길을 내려오면 송리단길의 카페거리로 이어지고, 공원 끝자락엔 조용한 벤치들이 깔려 있다. 그 벤치에서 호수와 조각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시의 소음이 잔잔하게 멀어진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송리단길의 로스터리 카페들이 당신을 격하게 반겨 줄 것이다. 큰 테이블이 있는 곳, 작은 테라스가 있는 곳, 조용한 이층 공간이 있는 곳 등 각자 취향에 맞게 고르기만 하면 된다.

송파주민들은 ‘때 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동네’이니까 방이동을 찾는다. 그들은 아침부터 붐비는 김밥집, 현지인들만 가는 해장국집, 공원 근처의 작은 카페 등에서 한가한 독서에 몰두한다. 줄 서는 곳은 배려의 미소와 함께 일부러 피해 주기도 한다.

오래된 방이전통시장과 세련된 송리단길이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다는 건 방이동만의 대조법이다. 제철과일을 고른 뒤 멕시칸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공원에서 일몰을 본 뒤 순댓국으로 마무리하는 여행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루 안에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두세 번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여행자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올림픽공원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세계평화의 문. 사진=필자 제공
올림픽공원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세계평화의 문. 사진=필자 제공


완성형 동네, 완성형 나들이

방이동은 역사와 생활, 자연과 외식, 여유와 활력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송파구의 인구 기반과 중산층의 탄탄한 소비력이 검증해 준 동네답게 맛, 분위기, 경치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혼자 와도 좋고, 친구나 연인과 와도 좋다. 너무 북적이지도, 너무 한산하지도 않은 그 적당한 밀도도 장점이다.

방이동은 여행지를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본래 갖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사람들이 그에 자연스레 호응하는 식이다. 그렇게 오래오래 사랑받는 동네가 됐다.

일단 한 번 가 보면 왜 사람들이 방이동을 좋아하는지 바로 알게 된다. 천천히 거닐면서 풍경과 맛, 공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보자.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가볍게 다녀오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자주 와서 조금씩 맛보고, 천천히 누리면 된다. 계절마다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니 철마다 와서 철마다 감동하는 것도 좋겠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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