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난공불락 ‘민심’…화산이 빚은 요새보다 높았다

입력 2025. 12. 03   15:04
업데이트 2025. 12. 03   15:07
0 댓글

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에든버러성(城)-스코틀랜드 독립항쟁의 중심에 서다

웨일스 지방 평정한 에드워드 1세
여세 몰아 1만5000 대군 몰고 침공
전의 상실한 귀족들은 저항 없이 굴복
공동체 지키려는 민중 저항 전면에
윌리엄 월리스 중심으로 독립전쟁
삼면이 절벽인 ‘캐슬 록’ 위 성채
국가 정체성·역사 재현의 공간으로

 

캐슬 록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성 전경. 필자 제공
캐슬 록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성 전경. 필자 제공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로 에든버러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이곳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도시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일명 ‘캐슬 록(Castle Rock)’과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에든버러성(Edinburgh Castle)의 장엄한 광경을 말이다! 사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인의 애환이 짙게 배어 있는 공간이다. 본격적인 시작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침공이었다. 브리튼섬 서쪽 웨일스 지방을 평정한 에드워드 1세가 여세를 몰아 1296년 말머리를 북쪽 스코틀랜드로 돌렸다. 이로써 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1296~1328)의 서막이 올랐다. 이때 민간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 바로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하트’에 등장하는 윌리엄 월리스(1270~1305)다.

에든버러성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1만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 잉글랜드군의 전략 목표는 다름 아닌 에든버러성이었다. 국경도시 베릭 약탈과 던바전투 이후 스코틀랜드군의 저항이 거의 무력화되자 잉글랜드군은 계속 북진해 스코틀랜드의 심장부인 에든버러까지 올라왔다.

자연 암벽 정상에 자리한 에든버러성은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군대가 나타났을 때 성 내부 수비 체계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패전의 책임과 처벌을 두려워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별다른 저항 없이 잉글랜드군에 성을 내주고 말았다.

손쉽게 에든버러성을 장악한 에드워드 1세는 이곳을 스코틀랜드 지배의 행정 및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 왕권을 상징해온 중요 기록문서나 값진 보물 등이 이곳을 거쳐 은밀하게 잉글랜드로 반출됐다. 이때 대표적 상징물인 ‘스콘석’(대관식용 직사각형 모양 돌 의자)도 빼앗겼다. 이때부터 에든버러성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내내 잉글랜드 통치의 상징 장소이자 스코틀랜드인들의 최대 공격 목표로 떠올랐다.

이러한 에드워드 1세의 오만한 행태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순응하기만 했을까? 아니었다. 바로 이듬해(1297)에 윌리엄 월리스가 주도한 저항운동이 재발했다. 1296년 잉글랜드 침공으로 스코틀랜드는 국왕을 잃고 귀족들은 강제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해 사실상 정복지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도 불만은 쌓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 옥좌에 스콘석이 설치돼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스코틀랜드 왕 옥좌에 스콘석이 설치돼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영웅 윌리엄 월리스. 필자 제공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영웅 윌리엄 월리스. 필자 제공



가장 강력하게 예기치 못한 저항의 불씨를 일으킨 인물이 바로 월리스였다. 원래 그는 귀족 가문 출신도, 그렇다고 정치적 야심을 품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정든 공동체를 지키려는 지역 기반 전사에 가까웠다. 빠르게 변화한 상황이 이러한 그를 독립전쟁과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의 구심점으로 만들었다.

난공불락의 외관을 지닌 에든버러성의 핵심은 바로 이를 떠받치고 있는 ‘캐슬 록’에 있었다. 성이 터를 잡은 이곳은 약 3억5000만년 전 지질 활동으로 형성된 ‘화산이 빚어낸 천연 요새’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당시 분출한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덩어리가 지표 침식 과정에서 잔존해 거대한 암반 언덕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후 암반은 주변 지형보다 훨씬 단단하고 침식에 강해 독특한 원형을 유지해 왔다. 서·남·북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고, 동쪽만 성 내부로 진입이 가능한 완만한 언덕 모양새였다. 한마디로 ‘3면 절벽·1면 경사’로 이뤄진 천혜의 방어 지형이었다.

캐슬 록은 단순한 천연 요새지로만 머물지 않았다. 세월을 관통하며 에든버러 도시 및 통치 구조를 조형한 핵심 공간이었다. 성 아래 동쪽 경사면에 사람들이 정착해 살면서 길이 발달해 현재의 ‘로열 마일(Royal Mile)’을 탄생시켰다. 에든버러는 성이 먼저 자리를 잡은 다음 도시가 그 주위를 따라 형성된 전형적인 ‘성곽 기원 도시’에 해당했다. 도시 전체가 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표적 사례다.

12세기에 들어서며 에든버러성은 명실상부하게 스코틀랜드 왕국의 ‘핵심 성채’로 자리 잡았다. 이때 유럽 대륙에서 도입한 앞선 석조 축성법으로 성의 방어 능력을 크게 강화했다. 그 덕분에 이곳은 왕이 주로 머무는 거처가 됐다. 당연히 왕실의 국고와 중요 문서, 그리고 장식품 등 중요 보물들이 보관됐다. 그러다가 1296년 잉글랜드 침공을 받아 성 전체가 에드워드 1세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후 끊임없는 보강과 파괴, 그리고 재건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에든버러성은 변함없이 도시 한복판에서 흡사 ‘수호신’의 모습으로 서 있다. 캐슬 록을 포함한 성의 높이는 약 80~130m이고, 전체 면적은 약 3만5000~4만㎡에 달한다. 지형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캐슬 록을 감싸고 있는 주요 성벽 높이는 약 8~18m 정도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시대마다 하나둘 더해진 결과 성 내부는 약 20동이 넘는 대소 규모 건물들이 다양한 건축 양식을 드러내며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중요한 몇몇 건물에 대해 살펴보면 우선 성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2세기 초반 왕실 예배와 종교의식 장소로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聖) 마거릿 예배당(St Margaret’s Chapel)이 있다. 성 내부 중심지에는 왕궁이 있다. 이는 16세기 스튜어트 왕조기에 왕권 행사의 중심 장소로 고딕 및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일명 ‘스코틀랜드의 명예(Honours of Scotland)’라고 불리는 왕관, 왕실 보검, 왕권 상징 홀 등이 보관·전시돼 있다.

왕실의 각종 행사 장소용으로 1510년대 지은 그레이트홀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한 번에 수백 명이 들어설 정도로 넓은 공간을 자랑하며 특히 장대한 목조 천장이 일품이다. 이외에 포대와 병영 등 군사적 용도의 건물들이 있다.

오늘날 에든버러성은 더 이상은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코틀랜드라는 국가 정체성과 역사 재현의 상징 공간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96년 긴 세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던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 ‘스콘석’이 에든버러성으로 반환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성 입구 광장에서 매년 야간에 거행되는 화려한 ‘로열 밀리터리 타투’ 공연은 세계적인 관광 상품으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에든버러성을 포함한 도시의 올드타운과 뉴타운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