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러시아 스파이들의 발을 묶어라
외교관 위장 국경 넘나들며 스파이 활동…
EU 회원국, 정보활동 사전 견제·차단 위해 러 외교관 국가 간 이동 제한 합의
EU, 러시아 외교관 국경 이동 제한
지난달 7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러시아 외교관들의 EU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외교관으로 위장한 러시아의 정보요원들이 EU 국가 간 출입국 절차를 생략하는 ‘솅겐 조약’을 악용해 국경을 넘나들며 스파이 활동을 하는 데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번 합의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작된 EU 국가들의 러시아 제재 패키지의 일환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외교관들은 주재국을 벗어나 다른 EU 국가로 이동할 때 출입국 절차를 거쳐야 한다.
러시아의 스파이 활동이 정보수집뿐 아니라 방화, 사이버 해킹, 드론 공격, 기간시설 파괴 등 공격적 양상을 띠고 있는 것도 이번 조치의 원인으로 보인다. 그동안 EU 정보기관들은 외교관으로 위장한 러시아 스파이들이 주재국에 체류 중일 때는 해당국 방첩기관의 감시와 통제를 받지만 같은 EU 국가로 이동할 때 출국 사실을 알 수 없고 이동한 국가에서도 입국 사실을 알 수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2023년부터 러시아 외교관 이동 제한을 주장해 온 체코에서는 실제로 스파이 혐의로 추방된 러시아 외교관들이 이웃 나라인 오스트리아 공관에 적을 두고, 다시 체코로 넘어와 여전히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한다. 얀 리파프스키 체코 외무부 장관은 FT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 공관에 소속된 러시아 외교관이 마음대로 프라하에 올 수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회원국 전체의 동의가 필요한 이번 합의는 러시아 부호의 재산에 대한 자산동결로 손해를 보고 있는 오스트리아가 동결 해제를 조건으로 내세워 지연되고 있지만, 조율을 거쳐 곧 실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모든 나라의 정보요원들이 외교관으로 위장(Official Cover·공직 가장)하고 주재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스파이들은 단순한 첩보 수집뿐 아니라 EU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막기 위해 파괴 활동을 포함한 위협적인 활동을 지속해 왔다. 특히 체코는 냉전 시절 소련연방의 위성국가로 공산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고, 최근에도 러시아의 파괴적 스파이 활동을 직접 경험한 터라 위협에 더욱 민감해 이번 결의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유럽 내 공세적 스파이 활동
최근 EU에서는 러시아 정보기관의 스파이 활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1년 4월 체코 정부는 일찍이 2014년 10월 체코에서 발생한 58톤 규모의 초대형 탄약 폭발 사고가 러시아 군사정보기관 GRU의 소행이었다며, 러시아 외교관으로 위장한 정보요원 18명을 추방했다. 사건 당시 우크라이나와 교전 중이던 돈바스 지역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판매될 탄약을 미리 제거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에는 러시아 정보기관 지시로 독일 내 미군기지 염탐 및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군수물자 파괴 공작을 추진하던 독일계 러시아인 2명이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지난 2월에는 독일 전역에서 ‘녹색이 되자’는 문구와 함께 건축용 폼 스프레이로 배기구를 막는 수법으로 차량 270대가 파손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연방의회 총선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지지 성향의 녹색당 지지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러시아의 공작으로 알려졌다. 9월에는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 시청 공무원이 러시아 정보기관에 포섭돼 주민자료·외교서한 등을 휴대전화로 촬영, 러시아 정보기관이 제공한 무선통신기기로 보고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이 자료들은 러시아 스파이들의 위장 신분 취득에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노골적인 위협도 빈번하다. 지난 8월 EU 집행위원장이 탑승한 비행기가 불가리아 상공에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신호가 끊겨 비상 착륙했고, 9월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 프랑스 등의 공항과 군 기지 주변에 미상 드론이 출현해 시설이 폐쇄되기도 했다. 이들 사건 역시 러시아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EU 국가들을 위협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구소련 시절부터 공세적 정보활동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는 해외정보기관인 SVR, 국내 정보와 방첩을 담당하는 FSB, 군사정보기관인 GRU 등이 모두 해외 공관에 정보요원을 파견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정보요원을 외교관으로 파견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외교관 중 정보요원 비율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2024년 3월 스위스 연방정보국(FIS) 대변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스위스 주재 러시아 외교관 218명 중 3분의 1은 정보요원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정보활동을 국가전략 수행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정보기관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했다. 이번 EU의 제재는 사후 조치인 외교관 추방과는 달리 은밀히 제3국으로 이동해 방첩기관 감시를 피하려고 하는 스파이들의 발을 묶어 계속 감시 상태에 두려는 사전적 방첩 대책이라고 볼 수 있다.
스파이 활동 차단, 견제는 방첩의 기본
방첩은 외국의 스파이를 찾아내고(색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며(차단), 압박을 통해 활동을 위축시키는(견제) 등의 방어적 활동뿐만 아니라 상대 정보기관에 우리 스파이를 심고(침투), 상대의 스파이를 포섭해 이중스파이로 활용(역용)하는가 하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상대의 오판을 유도(기만)하는 등의 공세적 활동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정보활동이다. 이런 방첩 활동의 본질적인 목표는 상대의 정보활동을 무력화(Neutralize)시키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외국에 파견한 정보요원들이 노출돼 간첩죄로 처벌받는 위험을 피해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각국 방첩 기관들은 자국 내 외교관 중 누가 정보요원인지를 식별해 감시하는 활동을 기본적 방첩 활동으로 수행한다.
EU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에 대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들이 입국 절차 없이 자국에 들어오는 경우 방첩기관이 감시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솅겐 조약에 따른 자유로운 국경 이동을 활용해 제3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러시아 스파이 입장에서 효율적 정보활동 기법이라고 한다면 출입국 신고를 통해 감시 아래 두겠다는 EU 국가들의 대응은 효율적 방첩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스파이 활동을 찾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면밀한 감시체계를 구축해 정보활동을 사전에 견제하고 차단하는 것이 본질적 방첩 목표 달성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 스파이들에 대한 방첩 대책을 좀 더 정교하게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 간첩죄의 적국 한정 규정을 시대에 맞춰야 하고, 통신비밀보호법의 미흡한 규정 등은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 방첩업무규정상 공무원과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들에게 부여된 외국 정보요원이나 수상한 외국인 접촉 시 신고 의무 등은 확실하게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제도적 정비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인 방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높아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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