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궁…가을 풍경 속으로
고즈넉한 종묘, 아름다운 창경궁, 우아한 창덕궁, 웅장한 경복궁
우리 역사가 숨쉬는 공간…저마다 고유한 가을 청취 품어
왕과 왕비가 머물고 거닐었던 곳, 500년 조선 왕조 흥망성쇠 고스란히
풍경소리·바람소리·낙엽소리에 젖어 보며…궁을 만나다
조선 왕가는 한양 도심에 ‘비밀의 정원’을 만들어 풍류를 즐겼다. 창덕궁 뒤에 조성된 후원이 대표적이다. 쉽게 들어설 수 없던 곳이라 지금까지도 울창한 숲과 단아한 전각, 고즈넉한 오솔길이 남아 있는 구역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후원에 발을 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정해진 수의 인원만 한정적으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은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11월이 그렇다. 후원의 화사한 가을을 맞이하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질 않아서다. 하지만 다른 고궁의 가을 풍경도 후원 못지않게 아름답다. 종묘부터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은 저마다 고유한 가을 정취를 품은 채 여행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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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비밀의 숲을 거닐다
종로 한복판에 있는 종묘는 아는 사람만 찾는 ‘숨은 보석’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다른 궁궐보다 관람객이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이 공간만이 품은 경건함을 지키기 위해 예약 시스템을 운영한다는 점도 오히려 종묘의 매력을 더한다.
왕이 신위를 모시는 삼도 주변으로는 수십·수백 년 된 거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은 마치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듯한 고즈넉함을 선사한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향대청, 재궁, 공신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특히 한적하다. 정전은 2022년부터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진행한 끝에 지난 4월 다시 관람객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기와 교체, 단청 보수, 석조 기단 정비 등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은 정전은 더욱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정전은 태조를 비롯한 조선의 왕과 왕비 49위의 신위가 모셔진 곳으로, 정면 19칸의 긴 건물은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다. 영녕전 뒤편으로는 2023년 복원된 창경궁 연결 통로가 있다. 일제강점기 율곡로 건설로 단절된 이 길이 80여 년 만에 개통되면서 종묘·창경궁·창덕궁을 하나의 동선으로 둘러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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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춘당지의 가을빛
창경궁은 서울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으로 지어진 궁이다.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1483년 창건한 이 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광해군 때 재건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돼 동물원·식물원으로 운영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86년 복원 공사를 거쳐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큼지막한 공터가 곳곳에 있는 것도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흔적이다.
백미는 단연 춘당지다. 창경궁 내 연못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춘당지는 원래 내농포라는 논이 있던 자리다.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곳이었지만 1909년 일제가 연못으로 조성했다. 춘당지 주변으로는 수양버들과 단풍나무가 즐비하다. 수면에 비친 단풍과 하늘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올 때가 가장 아름답다.
대온실은 창경궁의 또 다른 명물이다. 1909년 일본이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철골과 유리로 만든 온실은 열대·아열대 식물 110여 종이 자라는 사계절 푸른 정원이다. 대온실 주변으로도 큼지막한 나무가 많아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명정전도 놓치지 말자. 창경궁의 정전으로 조선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616년 광해군 때 재건된 뒤 큰 변화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국보 제226호로 지정된 명정전은 단층 건물이면서도 위엄 있는 자태를 뽐낸다. 창경궁은 덕수궁과 함께 서울에서 유일하게 상시 야간 개장하는 궁궐이다. 밤 9시까지 개방되는 창경궁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기회가 된다면 밤의 창경궁도 꼭 둘러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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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왕의 정원을 거닐다
창경궁에서 함양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넘어갈 수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의 권위를 지닌 궁궐이지만 실제로는 조선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문 궁이기도 하다. 태종 때인 1405년 창건된 이래 정궁 역할을 한 기간이 경복궁보다 훨씬 길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파괴된 것이 한몫했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었다는 점이다. 평탄한 대지 위에 일직선으로 전각을 배치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응봉 자락의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했다.
후원 예약이 어렵다고 창덕궁 방문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창덕궁과 어우러지는 가을 풍경 또한 아름다우니까 말이다.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온다. 이 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주요 국가 행사가 열린 곳이다. 인정전으로 향하는 삼도가 특히 일품이다.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올 때면 박석이 깔린 마당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창덕궁의 숨은 명소는 낙선재다. 헌종이 1847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지은 이곳은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멋이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덕혜옹주가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경복궁, 향원정의 가을
하이라이트는 역시 경복궁이다. 조선 왕조 최초의 정궁인 이곳은 1395년 태조가 창건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3년간 폐허로 방치됐다가 1867년 고종 때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1990년대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의 가을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단연 향원정이다. 1867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향원정은 육각형 정자다. 향원지 한가운데 인공 섬 위에 자리한 이 정자는 왕과 왕비가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향원지 주변의 단풍나무가 물들면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또 다른 명물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된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누각으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가장 큰 누각이다. 경회루 서쪽의 거대한 은행나무는 가을 경복궁의 상징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이 나무는 가을이면 노란 잎이 황금빛 카펫을 만든다.
고궁 산책, 가을을 품다
서울 고궁의 가을은 특별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역사와 자연, 문화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묘의 고즈넉함, 창경궁의 아름다움, 창덕궁의 우아함, 경복궁의 웅장함. 궁궐마다 고유한 매력이 있다. 고궁 산책의 매력은 느림에 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다 보면 평소 놓쳤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온다. 기와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나뭇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가을의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고궁은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거닐었던 길을 걸으며 500년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되새겨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도 있지만, 그것마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일부다. 단풍 구경이라면 굳이 멀리 갈 필요 없다. 지하철을 타고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서울 고궁에서 도심 속 가을 정취를 만끽해 보자. 창덕궁 후원 예약에 실패했다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서울에는 후원 못지않은 단풍 명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으니까.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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