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음악에 울려 퍼지는 종·포 소리…승리의 축포를!

입력 2025. 11. 04   16:18
업데이트 2025. 11. 0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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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1812년 5월 러 원정 나선 나폴레옹
‘청야전술’에 막혀 6개월 만에 퇴각
당시 불에 탄 대성당 재건하고
전승 70주년 기념 승전곡 의뢰
차이콥스키 6주 만에 완성해 초연
야외 기념식 위한 특수효과 추가

알브레히트 아담의 1841년 작품 ‘불타는 모스크바의 나폴레옹’. 필자 제공
알브레히트 아담의 1841년 작품 ‘불타는 모스크바의 나폴레옹’. 필자 제공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은 러시아였다.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러시아는 산업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대륙봉쇄령 준수를 더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1810년 12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1777~1825)는 칙령을 통해 와인·브랜디 수입 관세를 높여 프랑스의 주요 수출입품을 배척하는 조치를 했다. 이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러시아는 피해가 점점 심해지자 봉쇄령을 어겨가며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이제 러시아와의 전쟁은 시기만이 문제였다.


나폴레옹의 승부수, 러시아 원정

드디어 나폴레옹은 1812년 약 6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나선다. 당시로는 최대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왜냐하면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군수물자 보급과 병력 수급의 제한은 필연적이었다.


1812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출정을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약 3000㎞ 거리다. 이베리아반도 전쟁을 수행할 때보다 훨씬 먼 거리로, 보급 문제가 가장 취약하고 장기전으로 가면 무조건 불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후일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도 1941년 6월 러시아 원정을 시작했지만 1943년까지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철군하며 결국 패망의 길로 갔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경유해 6월 23일 러시아의 국경 네만강에 이르렀다. 그리고 코브노에서 강을 건너 본격적인 러시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러시아와의 교전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은 채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인 스몰렌스크까지 진출했다.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수적으로 열세한 면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러시아의 쿠투조프(1745~1813) 사령관이 펼친 ‘청야전술(淸野戰術)’이 더 큰 이유였다.

적이 활용할 만한 무엇도 남기지 않고 철수함으로써 식량, 군수물자 등 보급에서 곤경에 빠뜨리면서 지치게 하는 전술이었다. 8월 말에는 모스크바 근교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4만~5만 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그런 후 쿠투조프는 최대한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를 계속했다. 러시아 국토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여 지쳤을 때 반격을 가함으로써 승기를 잡겠다는 전략이었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불에 탄 모스크바에 세우도록 지시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전경. 사진=구세주그리스도대성당 홈페이지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불에 탄 모스크바에 세우도록 지시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전경. 사진=구세주그리스도대성당 홈페이지



청야전술과 동장군…파르티잔 포로가 되다

1812년 9월 초 나폴레옹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런데 도착 후부터 모스크바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6일이나 계속됐는데, 사방이 온통 불길로 휩싸여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 또한 청야전술의 하나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에게 평화 교섭을 제의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먹을 것, 잠잘 곳, 입을 것 등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이렇게 찾아 나서면 러시아의 파르티잔이 습격해 큰 피해를 줬다. 게다가 당시에는 겨울 추위가 빠르게, 그리고 아주 매섭게 찾아왔다.


나폴레옹은 한 달 동안이나 기다리다가 결국 10월 18일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과 보급품은 동이 났다. 지친 병력을 상대로 파르티잔은 계속 습격했다. 수많은 병력이 죽어갔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동상으로 거동이 힘들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남은 나폴레옹의 군대는 절반에 불과했다.


승리를 기념해 불에 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재건

이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불에 탄 모스크바에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세우도록 했다. 대성당이 1881년 완공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러시아는 여기서 1812년의 승전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완공식을 기념할 음악을 당대 러시아 최고 실력자인 차이콥스키(1840~1893)에게 의뢰했다. 차이콥스키는 1880년 10월부터 11월 초순까지 6주 만에 곡을 완성했는데, 이 곡이 그 유명한 ‘장엄 서곡 1812년(Ouverture solennelle 1812), Op. 49’다. 흔히 ‘1812년 서곡’이라고 부르는 곡이다.

실제 그리스도 대성당은 러시아 정교회 건물 중 최대 규모로 1882년 완공됐다. ‘1812년 서곡’의 초연은 성당이 완공된 후 전승 70주년을 기념해 이뤄졌다. 당시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듬해 비교적 조용히 행사가 치러졌다. 초연 당시에는 청중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자신도 “축제 악곡을 꾸며내는 데 맞지 않으며, ‘1812년 서곡’은 너무 시끄럽고 야하고 예술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완성

‘1812년 서곡’은 3개의 주제부로 구성되는데 연주 시간은 16분 정도다. 특이한 것은 끝부분에 대포 소리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야외 기념식을 위해 특수효과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시작은 비올라와 첼로가 주도하며 러시아 정교회 성가인 ‘신이여, 백성을 보호하소서’가 연주된다. 여기엔 러시아의 구원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어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아주 저음으로 연주되는데, 마치 청야전술을 구사하는 러시아의 전략이 반영된 듯 은밀히 후퇴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중간에는 북과 팀파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연주되며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마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밀고 당기는 전투가 진행되는 듯한 모습이 그려진다. 말미에는 여러 현악기가 빠른 템포로 연주되면서 후퇴하는 프랑스군과 반격을 개시하는 러시아군 전황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종탑의 종소리와 대포 소리는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듯하면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했다는 승리의 축포 같은 느낌을 준다.


석연찮은 차이콥스키의 죽음 

차이콥스키는 법학도였다. 그래서 음악 공부도 늦게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했고,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돼 1874년에는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1번’을 작곡했다. 1878년부터 재벌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이 후원자로 나서 교수를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재미난 것은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두세 번뿐이었고, 1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약 15년간 후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후원이 중단됐다.

차이콥스키는 9세 연하의 음악원 제자 안토니오 밀류코바의 자살 협박에 못 이겨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에서 휴식 겸 도피성 여행을 하며 작곡 활동을 계속하다가 1893년 숨졌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향곡 6번 비창’을 초연한 지 9일 만이었다. 당시 발표는 콜레라로 숨졌다고 했지만, 실은 차이콥스키가 당시 권력가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다는 게 알려져 그들로부터 음독자살을 종용받았다는 주장이 더 신뢰를 얻고 있다.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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