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도동서원
성리학 맥 잇는 대표 서원으로 김굉필 학문·덕행 추모
점필재 김종직에게 사사받고 정암 조광조에게 전수
2019년 유네스코 유산 등재로 역사적 가치 인정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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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조선의 학자들 가운데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으뜸으로 친다. 학문이 무언지 알았으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건지도 알았던 선비인 까닭이다. 학문과 삶이 따로 놀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생애를 살았다.
그는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과 더불어 ‘동방 오현(五賢)’을 이룬다. 광해군 때 모두 문묘에 배향된 인사들이다.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으뜸인 ‘수현(首賢)’으로 꼽힌다. 도동서원을 밖에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여섯 기둥을 둘러싼 흰색 천이 그 의미라고 문중은 설명한다. 이른바 ‘상지(上紙)’다. 경의를 표해야 할 곳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배를 타고 낙동강을 가다가도 멀리서 이 표식을 보고 예를 표했다”고 전한다(『도동서원』).
경북 달성군 현풍읍 솔례마을 도동서원은 멀리서 봐도 격이 높은 가옥 형태였다. 40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선 환주문으로 들어서면 좌우 돌담의 아름다움에 다시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유인들이 좋아한 배롱나무들도 곳곳에서 자태를 뽐낸다. 간결하고 검소해 더욱 돋보이는 중정당, 사당과 함께 1963년 국가보물로 지정받은 사실이 절로 이해가 된다. 담장은 자연석 위에 기와를 얹어 맞담으로 구성했다. 미감이 절로 묻어난다. 마당에는 강당인 중정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 두 기숙사 건물을 배치했다. 중정당엔 선조가 내린 사액과 『춘추』 기증서가 걸려 있어 품격을 더한다. 『춘추좌씨』는 촉의 명장 관우를 비롯해 옛사람들이 암송할 정도로 즐겨 읽던 책이었다. 이 책만이 맹자의 뜻에 합치된다고 평가받아 맹자의 가르침을 정칙으로 삼고 좌씨의 설을 참고했다. 도동서원은 한훤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8년 지역 유림들이 세운 쌍계서원이 그 효시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 현재 위치로 옮겨 다시 짓고, 1607년 사액되면서 도동서원으로 개칭했다.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담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피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국가문화유산포털』).
한훤당은 한양 정릉에서 태어나 18세에 경남 합천군 야로현의 순천 박씨에게 장가가면서 개울가에 서재 한훤당을 지었다. 이 당호가 아호가 됐다. 때마침 대유(大儒)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한훤당은 점필재의 문하생으로 입문해 소학(小學)을 배우는데, 이 시기의 배움이 한훤당의 일생을 결정짓는다. 그는 스스로 ‘소학동자’로 칭했을 만큼 소학에 빠졌다. 소학은 학문의 입문 과목으로서 주자의 표현처럼 ‘집을 지음에 있어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과정’에 속한다. 이 소학의 바탕 위에서 대학을 공부하게 된다. 점필재는 한훤당과 헤어질 때 소학을 건네며 큰 인물이 되기를 격려했다. 한훤당은 “소학 공부에서 지금까지의 잘못을 깨닫는다(小學書中 吾昨非)”고 여기고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다. “작은 털오라기도 태산처럼 존재를 갖는다(秋毫可竝於泰山)”는 생각은 사물의 겉모양보다 이치나 본질을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이러한 사고가 태극과 무극이 상통한다는 깨달음인 만유본체론(萬有本體論)과 ‘만 가지가 모여 하나가 되고, 만 가지로 나뉘어도 문란해지지 않는다’는 일리분수지리(一理分殊之理)를 낳는다(『추호가병어태산부』). 내면의 본성을 키워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이다. 구보는 이 대목이 장자(莊子)의 ‘인기지리무신(藺?支離無?)’ 고사와 상통한다고 여긴다. ‘위나라 영공(靈公)이 다리와 등과 입술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낸 의견에 탄복한 후부터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내용이다. ‘아름다움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사람의 가치는 외형이 아닌 내면에 있다’는 교훈을 준다. 구보는 이런 깨침 하나를 캐면 또 다른 인식들이 감자 뿌리처럼 딸려 나온다는 점에서 한훤당의 소학 공부가 깊었음을 본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소학을 접고 다른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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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를 계승한 그의 철학은 조광조와 김안국 등에게 전수됐다. 구보는 점필재를 사사한 기간이 1475년부터 1년 남짓인 사실에 비춰 한훤당이 스승으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은 후 독자적인 공부로 경지를 이뤘다고 판단한다. 점필재와는 1485년 ‘이조참판직을 제수하지 말 것’을 권유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국사에 이렇다 할 건의를 하지 않는 점’을 비판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구보는 한훤당의 철저한 ‘수신(修身)’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여긴다.
한훤당의 수신 중시는 첫닭이 울면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사당에 절하고 부모를 문안하는 일을 일상으로 삼은 데서도 확인된다.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면서 어찌 경비(輕肥·가벼운 가죽옷과 살찐 말)를 탐하랴”라는 게 그의 좌우명이었다. 선생의 가르침을 좇아 문중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차례씩은 4대가 나란히 밥상을 함께한다. 오늘날 가족이 깨지면서 다양한 사회문제가 생겨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한훤당의 예지가 빛난다.
한훤당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됐다. 생모 윤씨 폐비와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에 대한 연산군의 대대적인 복수극이었다. 윤씨가 다른 후궁들을 질투한 나머지 ‘자기와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거짓 투서를 만들고, 주술서와 비상을 갖고 있다 발각돼 폐비된 만큼(『성종실록』), 맑고 밝은 처신을 강조하는 소학의 기준에서 볼 때 김굉필은 잘못이라고 판단했을 터였다.
한훤당은 중종반정 때 신원이 돼 도승지에 추증됐고, 자손들도 관직에 등용됐다. 조광조 등 사림파가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훤당의 존재도 크게 부각돼 우의정에 추증되고 사우(사당)가 설치됐다. 성균관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 덕에 광해군 2년(1610)에 문묘(文廟)에 종사됐다. 막역한 사이였던 일두 정여창과 함께였다. 구보는 두 사람이 한훤당의 이로정(二老亭) 정자에서 교유하곤 했던 ‘절친’ 사이였으므로 지하에서나마 기뻐했을 것으로 여긴다.
구보는 모든 학문이 정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의 풍토를 마뜩잖아하지만, 그의 가치를 들여다본 유생들 덕에 한훤당의 학문이 맥을 계승했음은 다행으로 여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의 가르침이 사대부의 탐욕과 사대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사실은 못내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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