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제10회 국방 청렴문학상 최우수 수상작(국방부 직무감찰과 주관)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
이 단어는 오랫동안 교과서 속 추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대학에 진학해 의료윤리 수업을 들으며 제약회사 리베이트나 환자의 청탁에 관해 배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저런 의사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막연한 다짐으로만 넘어갔을 뿐 청렴이란 가치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육군22보병사단에서 K9 자주포 포수로 군 복무를 하면서 청렴이란 가치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됐다. 특히 한 분의 포대장님이 준 깊은 깨달음은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이OO 포대장님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셨다. 아침점호 때부터 저녁점호까지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규정과 규율을 중시했다. ‘군인이라면, 국가공무원이라면 더욱 청렴해야 한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경직돼 보이기도 했고, 인간적인 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대장님의 일관된 모습이 부대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다. 부정이나 특혜, 편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모든 장병이 공정하다는 신뢰 속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약 1년의 세월이 흘러 포대장님의 전출 소식을 듣게 됐다.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평소 원칙을 중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으로 ‘청탁금지법’을 꼼꼼히 찾아봤다. 5만 원 이하의 선물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P사의 고급 볼펜을 택해 부대 이름과 포대장님 성함의 이니셜을 새겨 넣어 특별함을 더했다. 그동안의 소회와 감사인사를 정성스럽게 편지에 담아 함께 준비했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고민했다. 하지만 순수한 감사의 마음이었고, 법적으로도 문제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 포대장님께 전달해 드렸다.
“고마운 마음은 알겠지만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진혁아.” 포대장님의 첫 반응이셨다. 당황한 나머지 찾아본 청탁금지법 내용을 설명했다.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으며, 5만 원 이하의 선물은 허용된다고 말씀드렸다. 포대장님의 답변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법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말이야, 한 번 이런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다음에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될 거야. 네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후임 포대장한테 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거든. 애초에 그런 유인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편지만 받을게.” 애써 고민하고 준비한 선물을 차갑게 거절당한 것 같아 솔직히 서운한 감정도 들었으나 포대장님의 말씀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법적 기준을 넘어 훨씬 높은 도덕적 청렴의 기준을 스스로 적용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예상치 못한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사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났거든. 그동안 네가 정말 잘해 줘 고마웠어. 특히 마지막에 이런 선물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민했을지 아는데 받지 못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 상황도 이해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앞으로도 늘 건강하고 좋은 의사가 되길 바란다.”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용사의 마음을 거절해야만 했던 포대장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깨달았다. 개인적 감정보다 공적 원칙을 우선시하면서도 한 사람의 마음마저 세심하게 헤아려 주는 따뜻함까지 겸비하신 분이었다.
지금도 포대장님의 성함이 새겨진 그 펜을 늘 지니고 사용한다.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새겨진 펜을 쓴다니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이 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다. 청렴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원칙의 상징이다. 펜에 새겨진 이름을 볼 때마다 포대장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진정한 청렴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매번 새롭게 하게 된다.
노자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말했다. 청렴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구호나 이론이 아니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뒤 부대에서 분대장과 포반장으로서 작은 청렴부터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전방부대 특성상 실제 상황 대기와 각종 훈련이 잦아 청렴교육이나 물자 관리에 소홀하기 쉽다. 하지만 포대장님의 가르침을 새겨 귀찮더라도 물자 검사 때 하나하나 정확히 세고, 후임들에게 모든 물자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됐음을 강조하며 청렴의식을 심어주려 한다.
또한 분대장으로서 매달 받는 분과 활동비 관리에도 투명성을 더했다. 관례상 선임 분대장들은 소액이란 이유로 일부는 개인적으로 써도 된다고 했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부임한 이후엔 모든 분대장이 매달 분과 활동비 사용 내역을 영수증으로 처리하고, 모든 금액을 투명하게 ‘분과비’ 용도로만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너무 까다롭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부대 간부님과 다른 분대장들이 이런 취지에 공감해 줘 지금은 모든 분대에서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
전역을 4개월 앞두고 있다. 먼 훗날 의료인이 되면 청렴의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환자나 보호자가 감사의 표시로 건네는 답례품, 제약회사에서 제공하는 리베이트,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유혹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포대장님을 떠올리며 흔들리지 않는 청렴한 의료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포대장님 같은 ‘따뜻한 원칙주의자’가 많아져 청렴한 대한민국 국군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원칙은 지키되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그러한 리더가 많아질 때 우리 군도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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