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나폴레옹 전쟁 전개와 파가니니의 음악 헌정
쿠데타로 권력 장악하며 황제 즉위
유럽 평정했지만 英 대륙봉쇄 자충수로
절대 지지 황제서 몰락의 길 들어서
나폴레옹 동생 엘리자도 열광했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불린 파가니니
G선만 사용 소나타 황제 생일에 헌정
|
이집트 원정에서 파리로 복귀한 나폴레옹은 자신을 제거하려던 혁명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는 이전부터 총재정부를 제거하려던 시에예스(1748~1836)가 나폴레옹을 설득해 추진됐다. 1799년 11월 ‘브뤼메르(안개의 달, ‘무월광’이라는 의미) 18일의 쿠데타’로 불리는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나폴레옹은 스스로 통령이 됐다. 그동안 혁명전쟁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대중은 그를 지지했고, 투표를 거쳐 종신 통령이 됐다.
나폴레옹은 1800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는데, 잘 알려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크게 이기면서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 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했다. 이제 프랑스를 상대로 적대적 관계로 남아있는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그러나 영국도 1802년 3월 프랑스와 아미앵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인정하면서 길었던 프랑스혁명 전쟁은 끝이 났다.
나폴레옹,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 황제로 즉위
나폴레옹은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대관식을 가졌다. 그동안 황제가 되려면 로마로 가서 교황이 수여하는 왕관을 받아야 했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을 프랑스로 오도록 했다. 또 교황의 왕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을 집어 썼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제를 타파하고 시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변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던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중심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언제든 공격해올 영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독일),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특히 영국의 해군력은 최고였다. 해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03년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프랑스 해안을 봉쇄하는 조치를 강행하며 주변국들과 프랑스 공격을 계획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해군과 연합함대를 구성해 해군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1805년 초 그는 영국 본토에 상륙해 영국을 제압한 뒤 유럽 내륙의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나폴레옹은 해협을 건너기 위해 영국 도버에서 가까운 프랑스 불로뉴 해안에 약 18만 명을 집결시켰다. 아울러 스페인 함대와 연합해 영국 해군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함정의 숫자로는 연합함대가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보다 항해술이 뒤처졌고, 함포 사격의 정확성도 많이 떨어졌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이런 취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참패했으나 내륙에서는 압승
1805년 10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해군과 트라팔가르(스페인 남서쪽)에서 마주쳤다. 넬슨은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전술을 펼쳤다. 중앙을 돌파해 양쪽으로 분리된 적을 격파하는 전술이었다. 이는 항해술과 함포의 명중률이 낮은 연합함대의 취약점을 이용하는 전술이었다. 개전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연합함대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다. 넬슨의 함대는 천하무적이었다.
한편 이 무렵 내륙에서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라인강변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상륙작전을 접고 집결했던 병력 18만 명을 라인강변으로 이동시켰다. 이어진 울름(뮌헨 서쪽) 전투와 아우스터리츠(체코 동부)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의 전술이 잘 발휘됐다. 내륙에서는 이제 프랑스군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 전공이었다.
1805년 10월 중순 벌어진 울름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약 7만 명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포위해 4만 명 이상을 궤멸시켰다. 울름 전투의 성과로 나폴레옹은 빈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같은 해 12월에 있었다.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연합군은 약 8만5000명으로 프랑스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전술을 미리 간파한 나폴레옹은 적을 분리해 각개격파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적중했고 연합군이 크게 패했다.
이 결과로 러시아는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으며 1000년을 내려오던 신성로마제국의 해체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프로이센 또한 군사행동에 가담하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해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 견제하려던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다
유럽 대륙을 평정한 나폴레옹은 어떤 식으로든 영국을 견제해야 했다. 언제든 다시 대륙 국가들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대륙의 국가들과 영국 사이의 무역을 모두 중단시켰다.
하지만 영국은 1807년 11월 11일 ‘긴급명령 1807년’을 발표해 프랑스와의 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강한 해군력으로 프랑스의 해안을 역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나폴레옹도 이에 대응해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영국의 항구를 이용하거나 영국에 관세를 내는 중립국 상선은 영국 국적 상선으로 간주해 나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오히려 프랑스 안팎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또 유럽 대륙을 경제적으로 더 어렵게 만듦으로써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며 결국 몰락의 길로 가는 자충수가 됐다.
먼저 해상 무역으로 커피, 코코아, 향신료 등의 물자가 대륙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해안이 봉쇄됨으로써 가격이 폭등했다. 중개상의 활동이 축소되며 밀무역이 성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서 해상을 통해 프랑스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차단됐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물자의 유통도 중단됐다.
대륙봉쇄령은 많은 불편을 겪던 프랑스 상인들과 귀족들도 나폴레옹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불씨가 됐다. 더불어 경제 침체는 물론 공업제품의 구매력 감소와 금융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니콜로 파가니니, ‘나폴레옹 소나타’ 헌정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나폴레옹 소나타(Sonata Napoleone, MS. 5)’를 작곡해 나폴레옹의 생일에 헌정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란 별명으로 유명한 파가니니는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천재적 기술력으로 오늘날에도 많이 쓰이는 피치카토, 하모닉스, 스코르다투라 주법 등의 새로운 연주 기법을 창안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1777~1820)를 이탈리아 북부 피옴비노 공국과 루카 공국의 대공녀가 되도록 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파가니니의 연주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파가니니의 연주에 매료된 엘리자는 남편이 영주로 있는 피옴비노 공국의 음악감독직을 주면서 파가니니와 가까이 지내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다.
파가니니도 그녀를 위해 ‘24개의 카프리치오’ ‘루카 소나타’ 등 많은 곡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1807년 8월 나폴레옹의 생일에 곡을 헌정하면 어떻겠냐는 엘리자의 제안으로 만든 곡이 ‘나폴레옹 소나타’다. 당시 엘리자는 바이올린의 4개 현 중 G선만을 사용해 작곡하도록 요구했는데, 그녀가 파가니니를 오래도록 옆에 붙들어 두고 싶어 곡을 어렵게 만들도록 했다는 해석도 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