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대와 함께하는 ‘국방안보진단’
37. 남북의 문이 닫힐 때 전략의 공간은 열린다
남북 전통적 대화 창구 무력화 상태
러, 우크라이나와 전쟁 종결 앞두고
경제 회복·외교 정상화 필요성 커져
한, 확장억제 전통적 억지 강화하되
위기관리·다자 안정 이중전략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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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남북 간 소통이 전면 중단되면서 전통적인 대화와 협력 중심의 접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동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이 임박하면서 러시아의 전략적 행보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이런 전환기에 한국은 중국·러시아를 통한 간접적 소통과 위기관리 채널을 재정비하며, 남북 간 긴장 완화와 역내 안정의 전략적 조건을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정리=윤병노 기자
남북 관계와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략
한반도 정세는 중대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북한은 헌법 개정과 여러 차례 공식 성명에서 “남한은 더 이상 동족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으며, 이후 남북 간 소통 경로는 사실상 전면 차단됐다. 지난 9월 20·21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며 남한과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상호 단절과 불신이 굳어지는 가운데 기존의 민족 공조나 교류협력 중심의 접근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대북전략이 되기 어렵다. 전통적인 대화와 협력 채널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의 전략적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남북 관계의 구조적 단절상황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전반에도 재편 조짐이 감지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 국면에 진입할 경우 러시아는 전후 재건과 외교적 고립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군사적 소모와 외교적 부담을 상쇄하기 위한 대외전략의 재조정에 착수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의 관계 역시 일정한 조정을 겪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북한과의 직접 대화가 어려운 구조를 우회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 즉 중·러와 연계한 간접 소통공간 복원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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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대화의 경직성, 간접적 조정의 필요성
현재 북한은 남한을 완전히 배제한 채 외교전략의 중심축을 러시아로 전환하고 있다. 남북 간 고위급 채널은 물론 실무 수준의 연락망조차 단절된 상태다. 9·19 군사합의도 사실상 파기된 상황이다. 이처럼 직접 접촉이 불가능한 구조에선 중재자 없는 대치상태가 고착화할 위험성이 크다.
북한의 외교적 운신 폭이 완전히 자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러시아를 경유한 제한적 메시지 전달 또는 상황관리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불안정이 자국의 전략적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일관되게 인식하고 있으며, 러시아 역시 전후 국면에서 국제사회 복귀를 위한 ‘책임 있는 정상국가’로서 모습을 일정 부분 부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공통의 이해 기반과 협조의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의 전략 변화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은 러시아의 전략환경에 결정적 변곡점을 가져올 것이다. 전후 재정 부담, 기술 격차에 따른 산업 공백, 외교 고립 장기화 등 복합 위기상황에서 러시아는 경제 회복과 외교적 정상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추구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서방 국가들(한국·인도·튀르키예 등)과의 제한적 협력이나 복구 파트너십을 고려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북한과의 관계 역시 이러한 재정비 과정에서 재조정될 여지가 있다. 군사협력과 노동력 제공 등 단기적 실익에 집중된 현재의 북·러 협력 구조는 전후 국면에서 러시아가 국제적 이미지 제고와 외교 다변화를 시도할 경우 조정 가능성이 있는 영역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이 러시아를 활용한 북한과의 간접적 접촉, 소통 채널 확보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의 전략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은 확장억제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억지전략을 강화하는 동시에 간접적 위기관리와 다자적 안정 구조 설계라는 이중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첫째, 중·러와 외교 채널을 열어 두고 북한의 핵·재래식 무력시위가 역내 전체의 전략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북한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위협이나 압박의 형태가 아니라 역내 안정이라는 공동이익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조율해야 한다.
둘째,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이후 러시아가 필요로 할 경제·기술협력 분야에서 국제제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전략적·외교적 포지셔닝이 필요하다. 예컨대 러시아 재건 관련 국제포럼 참여, 기술협력 제안 등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간접적으로 조율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셋째, 중·러와의 비공식 대화 채널 활성화도 병행해야 한다. 중·러를 통한 남북 관계의 간접 조율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 간 대화뿐 아니라 트랙1.5, 트랙2 등의 다각화된 소통 채널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동북아 위기관리 매뉴얼 공유, 전략 시나리오 워킹그룹 운영, 정책 공동연구, 두만강 유역 개발 프로젝트 참여 등은 간접 소통 기반을 확보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전략적 공간은 존재한다
남북 관계는 경직 국면에 접어들었고, 북측의 태도는 완강해 보인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재편기, 러시아의 전후전략 재정비 과정은 우리나라 외교·안보전략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은 대화 재개 그 자체에 집착하거나 성급한 관계 회복을 기대하기보다 위기 통제와 안정 유지라는 실질적 목표를 중심에 둔 전략적 접근이 우선돼야 한다.
그렇다고 소통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다. 직접 대화가 어렵다면 간접적 방식으로라도 전략적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외교적·안보적 공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한반도 역내 평화와 안보는 일회적 협상보다 지속 가능한 위기관리 구조와 책임 있는 다자 구도의 구축으로 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한 간접 소통과 외교적 조정의 통로 확보는 결코 부차적이지 않다.
한국은 남북 관계 단절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넘어 전환기 질서를 유연하게 조정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주체적인 행위자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성급한 대화 시도가 아니라 소통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새로운 소통 구조와 긴장 완화를 위한 전략적·제도적 기반을 차분히 마련해 나가는 작업, 그것이 대전환기 우리의 안보전략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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