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스타를 만나다 - 베이비몬스터
두 번째 미니 앨범으로 돌아온 베몬
‘위 고 업’ 묵직한 연주·쏘아붙이는 랩
액션 영화 재현 블록버스터 뮤비 화제
무대 위한 노래…각인효과 강력하지만
통속성·예술성 균형 맞춘 음악 숙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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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풍 삭막한 미래 도시에 여섯 여전사가 진입한다. ‘매트릭스’ ‘킬 빌’ ‘블레이드 러너’ ‘엑스맨’ 등 대중문화 속 유명 영화를 방불케 하는 과격한 액션 신을 배경으로 미지의 적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이들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비범한 존재들로 묘사된다. 3년 전 에스파의 ‘Girls’가 그러했듯 서늘하고 묵직한 일렉트릭 기타 연주와 함께 전개하는 트랩 비트 위에서 멤버들은 쉴 새 없이 목소리를 쏟아낸다. 기관총처럼 쏘아붙이는 랩,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곳곳에 내뱉는 하이 노트 애드리브가 타격감을 자랑한다.
이쯤 되면 듣는 음악이 아니라 한 편의 일인칭 슈팅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하다. 노래를 부르는 그룹은 스스로를 킬러, 또는 빌런이라고 소개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칠 줄 모르는 야망, 미지의 전장에서 벌이는 스펙터클 블록버스터. 지난 10일 두 번째 미니 앨범으로 컴백한 베이비몬스터의 신곡 ‘위 고 업(We Go Up)’이다.
K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때로 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적 속성을 간과하게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K팝의 인기 원인 가운데서도 어쩌면 가장 원초적으로 도파민을 자극하는 재미 요소 말이다. 우리는 할리우드만큼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를 천문학적 자본으로 구현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폭넓은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갈 만큼의 집념도 아직은 부족하다.
대신 우리는 모든 역할을 맡길 수 있는 다재다능한 슈퍼히어로들을 육성해 춤과 노래로 세상을 사로잡는 비결을 터득했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맞춰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수행하는 동시에 범상치 않은 가창까지 선보이는 K팝은 가상이 대두되는 오늘날 현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종합 퍼포먼스 음악이다.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렬한지 호시탐탐 이승을 노리는 저승의 악귀들마저 무릎을 꿇을 정도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주목받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K팝 그룹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요소 역시 엔터테인먼트다. 커다란 무대를 꽉 채우는 다인원 그룹이 대규모 백댄서들과 힘찬 연주의 밴드 세션, 휘황찬란한 무대 장치와 함께 날아올라 온몸을 불사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방탄소년단이 그러했고 몬스타엑스, 세븐틴, 스트레이키즈가 뒤를 따랐다.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헌트릭스의 우상이다. BTS처럼 서사와 음악, 창작의 삼각 편대를 구축한 경우를 제외하면 K팝에서 열광하는 세계관이나 체계적인 제작 과정, 기획자의 주제의식과는 거리가 먼 그룹들이다.
대신 그들은 무대 위에서 신나게 놀 줄 안다. 수만 명의 관객을 일으켜 춤을 추게 만든다. 리듬감에 맞춰 의미를 포기한 가사나 의문스러운 표현, 곡의 정교한 짜임새 등은 중요치 않다.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심장이 반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이 연예인이 아니라 가수의 본질 아니던가. 최근 K팝에서 자주 등장하는 태도 및 가창력 논란 역시 이런 맥락을 파악하면 이해가 쉽다. 흥미로운 이야기나 곡의 만듦새가 부족할 때는 섬세한 표현보다 시원시원한 표현의 정도가 무대의 가치를 증명한다.
베이비몬스터는 K팝의 강령을 충실히 따른다. 빅뱅, 2NE1, 블랙핑크, 위너, 트레저로 이어지는 YG엔터테인먼트의 새 걸 그룹인 만큼 패기 하나는 수준급이다. 자신을 작은 괴물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이들은 데뷔 전부터 소속사가 오랜만에 내놓는 걸그룹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데뷔 후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에서의 높은 화제성이 곧바로 실질적인 인지도로 교환되지는 않았다.
베이비몬스터가 주목받은 계기는 라이브 클립이다. 생라이브, 옥타브, 무반주, 성량…. 상대적으로 그룹의 피지컬적 요소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데뷔곡 ‘배터 업(Batter Up)’과 ‘포에버(Forever)’에서 뜨뜻미지근했던 반응이 확실한 하이라이트 파트를 갖추고 있는 ‘쉬시(Sheesh)’, 공격적인 랩과 하늘 높이 치솟는 3단 고음으로 무장한 ‘드립(Drip)’에서 반전을 일군 비결이다.
성량만큼은 동세대 최고 반열에 오른 메인 보컬 아현을 필두로 한 라미, 로라, 치키타, 파리타의 보컬 라인, 일본인 멤버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정확한 발음을 선보이는 아사와 루카의 랩 라인이 짧은 곡 내에서 상승과 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의 스릴을 유도한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트랙이 무한히 하늘 위로 솟아 있다는 것뿐이다. 세계 정상에 서겠다는 굳은 야망으로 직진한다.
노래를 위한 무대가 아닌, 무대를 위한 노래를 제작하는 K팝 테마파크의 운영 방침에 맞춰 베이비몬스터의 노래 역시 정적인 감상보다는 군중 속에서의 합창을 유도한다. ‘가나다라마바싸가지’ ‘찌릿찌릿 끼리끼리 놀아볼까’와 같은 노랫말은 헛웃음이 나오지만, 곡을 각인케 하는 강력한 맥거핀으로 작용한다. 대부분 곡이 3분 내로 끝나지만 중간 무드 전환을 통해 퍼포먼스의 압축을 유도하고 있다. 음악 자체보다 투어를 상상하면서 듣게 되는 음악이다.
비장한 ‘위 고 업’이 화려한 시작을 알리면 ‘배터 업’과 같이 힙합과 댄스를 결합한 ‘싸이코(Psycho)’가 등장한다. 알앤비풍의 ‘슈파 두파 러브(Supa Dupa Love)’가 전작의 ‘빌리어네어(Billonaire)’ 와 함께 곡 중 반전으로 흥미를 돋운 다음 그룹의 히트 타이틀 세례를 퍼부은 뒤 청량한 컨트리 록 트랙 ‘와일드(Wild)’와 함께 쏟아지는 종이꽃을 맞으며 작별을 고한다. 뮤직비디오를 시청하지 않고도 듣는 것만으로 보는 음악을 구현하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의 강점이다.
단점도 있다. 아무리 신나는 음악이라 해도 결국 통속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맞춘 음악이 오래 살아남는다. 테디가 더블랙레이블을 세워 떠난 이후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의 음악은 체험에는 충실하나 곡 자체의 매력은 떨어졌다. ‘위 고 업’도 마찬가지다. 네 곡은 흐름을 탄 베이비몬스터의 이상과 포부를 내비치는 목표 이상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 화려한 투어 후 셋리스트 갱신의 반복. 다른 의미의 ‘큰 음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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