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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날리는 ‘미치광이 전사’ 용맹한 죽음 맞이한 까닭

입력 2025. 10. 01   16:36
업데이트 2025. 10. 0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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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비르카 바이킹 무덤군: 바이킹 전사 용맹함의 근원을 엿보다 

싸움 앞두고 겁내는 것은 큰 수치 
사후 ‘오딘의 전사’로 영웅의 전당에…
인간 병기로 길러지며 세계관 체득
선두에 선 ‘광(狂)전사’ 베르세르크 
‘프랑시스카’라 불린 도끼 즐겨 사용
회전력·관통력 강하고 가벼워 한 손에
전투 직전 던져 적 진영 무너뜨리기도

1991년 비르카 무덤군 발굴 모습. 사진=위키커먼스
1991년 비르카 무덤군 발굴 모습. 사진=위키커먼스



 한동안 원형 방패를 든 배트맨 유사 복장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토르’라는 제목의 영화도 소개된 바 있었다. 토르라는 명칭은 바이킹의 신들 중 하나에서 유래했다. 영화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이름은 ‘발할라’다. 바이킹 용사가 적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사후에 들어간다는 일종의 영웅의 전당인 셈이다. 이외에도 독자들은 ‘13번째 전사’(1999년),‘발할라 라이징’(2009년), ‘더 노스맨’(2022년) 등의 영화에서 바이킹의 용맹함과 전사정신, 이와 연관된 신화적 세계관 등을 체감한 경험이 있으리라고 본다.

바이킹 전사의 용맹한 모습은 전장(戰場)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숙련된 전사 집단이자 전투에 최적화된 인간 병기였다. 바이킹 소년들은 어린 시절부터 일종의 전문 싸움꾼이 되는 길을 걸었다. 이들은 유년 시절부터 무기 사용법, 사냥기술, 항해술, 실전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더구나 평소에도 폭력과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였기에 용기와 무용(武勇)은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자 성인 남성의 증표였다. 이들은 부족 간 분쟁이나 해외 원정 등 끊임없는 전투환경에서 생활하며 강인한 바이킹 전사로서 정체성을 체득했다.

바이킹 전사들은 싸움을 앞두고 두려움을 표출하는 행위를 커다란 수치로 여겼다. 관련 역사 기록에는 바이킹 전사들이 수백 명의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마지막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다는 묘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용맹한 전사로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어야만 이들의 토착종교 속 천당인 발할라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베르세르크(Berserkr)’로 불린 전사들이 가장 무서웠다. 이들은 전투 중 일종의 광기(狂氣) 상태에서 어떠한 고통과 두려움도 무시한 채 마치 맹수처럼 싸웠기에 적군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늑대나 곰의 가죽을 걸친 이들 광전사(狂戰士)가 선두에서 치고 나가며 전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바이킹의 무장을 엿볼 수 있는 화가 한스 달의 그림.
바이킹의 무장을 엿볼 수 있는 화가 한스 달의 그림.

 

화가 막스 브뤼크너가 1896년 그린 발할라의 모습.
화가 막스 브뤼크너가 1896년 그린 발할라의 모습.

 

바이킹의 원형 방패. 사진=위키백과
바이킹의 원형 방패. 사진=위키백과

 

바이킹의 전투용 도끼. 사진=위키백과
바이킹의 전투용 도끼. 사진=위키백과



그렇다고 바이킹 전사들이 무턱대고 무모하게 적진으로 돌진한 ‘무뇌남(無腦男)’은 아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전투기술을 연마하고 조직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라 전투 중 상황에 따라 원형 방패를 활용해 방패 벽(shield wall)과 같은 일체화된 전투대형을 구사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여기엔 이들의 최적화된 무기와 방어구가 한몫했다. 바이킹 전사들은 도끼, 검, 창, 원형 방패를 능숙하게 다뤘다. 일부는 철제 투구와 사슬 갑옷을 착용해 방어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적군에게 위압감을 줬다.

바이킹의 무기체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무기는 ‘프랑시스카(francisca)’로 불린 도끼였다. 이는 프랑크족과 바이킹이 주로 사용했던 투척용 도끼(throwing axe)를 말한다. ‘프랑크족의 무기’라는 이름에서 유래됐으나 바이킹도 전투 개시 직전 투척해 적 진영을 와해시키는 용도로 이 무기를 즐겨 사용했다. 경량이었기에 한 손으로 잡고 휘두를 수 있어 근거리 백병전에도 적합했다. 약 40~50㎝의 짧은 나무손잡이 끝에 널찍한 곡선형의 철제 도끼날이 끼워져 있었다. 무게중심이 도끼날 쪽에 있어 표적을 향해 집어 던졌을 때 회전력과 관통력이 남달랐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모든 인간의 본성이거늘 어떻게 바이킹 전사들은 이토록 용맹했을까? 이들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도록 추동한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원천적으로 이들의 용맹한 행동 이면엔 단순한 신체적 강인함이나 무술훈련을 넘어서는 세계관, 운명을 향한 믿음, 명예 중심의 가치관 등이 놓여 있었다.

이들은 숙명론과 북유럽 발할라 신화에 기초한 세계관의 지배를 받았다. 각자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전사로서 명예롭게 죽으면 오딘의 전사로 승화돼 일종의 무릉도원인 발할라에 들어간다는 신화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바이킹 사회에는 명예와 수치의 문화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전투 중 도주하거나 겁을 내는 것은 개인의 명예 실추는 물론 가문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곧 명예였고, 용맹은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러한 바이킹 사회의 종교와 문화적 특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유적 중 하나가 스웨덴의 세계문화유산인 ‘비르카 바이킹 무덤군’이다. 비르카는 스웨덴에서 가장 중요한 바이킹 시대 초기 무역 중심지이자 정착지였다. 오늘날 스톡홀름 북서쪽의 비켄 호숫가에 위치해 있으며,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번성했던 바이킹 시대의 교역도시였다. 특히 발트해와 북유럽 내륙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간지점에 있었기에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류하는 허브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비르카는 북유럽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도시이기도 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사망자 수도 늘어났다. 당시 지배계층과 영향력 있는 전사, 유력한 상인 등이 비르카 주변에 대규모 묘역을 조성했고 그곳에 다채로운 부장품과 함께 매장됐다.

비르카와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바이킹 무덤은 1100여 기에 달한다. 비르카 도시가 성장하면서 수천 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사람이 어울려 살았기에 대규모 무덤군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무덤은 대부분 화장(火葬) 후 뼛가루를 묻고, 그 위에 돌무지를 쌓은 모양새였다. 이는 바이킹 시대 전반기의 주 무덤 형태였다.

비르카 무덤군의 경우 10세기 이전(약 750~950년 사이)에 형성됐기에 (무덤군 외곽이나 저지대에는 하층민의 매장인 평지묘도 있지만) 무덤군의 안쪽이나 언덕배기엔 상류층의 돌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무덤들은 단순한 토광묘부터 큰 돌무지무덤(봉분묘), 목곽묘 등 다채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19세기부터 고고학 발굴이 이뤄져 인골, 무기,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비르카 무덤군은 스웨덴 바이킹 사회의 여러 측면을 엿보게 한다. 도시의 사회구조, 무역활동, 종교 변화(이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전환)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무덤 규모와 출토 부장품의 차이로 당시 바이킹 사회의 계급구조도 알 수 있다.

더구나 비르카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은 비잔티움, 서유럽, 심지어 중앙아시아와도 연결돼 있던 바이킹 시대 무역망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북유럽에서 처음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물도 출토되는 바 당시 종교적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고고학 및 역사학적 가치로 인해 비르카 무덤군은 이미 19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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