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조선의 냉장고 ‘빙고’
길이 90·너비 45·두께 21㎝가 1정
동빙고 1만여·서빙고 13만여 정 보관
12~1월 한강 20㎝ 이상 얼 때 채취
주민도 동원…매일 1명당 2정씩 옮겨
왕실 전용 내빙고 운반 “백배 고생”
다산 정약용, 궐내 제빙 아이디어도
서울 용산구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은 얼음창고가 있던 두 마을을 지칭한다. ‘빙고(氷庫)’는 1396년(태조 5년)에 설치했다. 지금은 둘 다 모습을 잃었지만, 지명과 전철역의 이름으로 남았다. 서빙고는 해발 77m의 둔지산이 한강과 만나는 자락에 있었다. 지대가 높고 그늘이 지며 바람이 잘 통하는 지형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지금의 경의중앙선 서빙고역 맞은편이었다. 건물 앞에 ‘서빙고 터’ 표석이 서 있다. 동빙고는 두모포(옥수동)에 있었으나 연산군의 사냥터가 되면서 1504년 서빙고 인근 둔지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이후 1896년까지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했다.
구보는 동빙고동에 아프리카·중동 등 더운 나라 공관이 모여 있는 광경을 흥미롭게 여긴다. 동빙고는 얼음 1만244정(丁)을 두고 3월 1일부터 9월 상강까지 제향에 맞춰 사용했다(『만기요람』). 길이 90㎝, 너비 45㎝, 두께 21㎝인 1정은 쌀 1되 값으로 귀했다.
빙고가 있어 동부이촌동 앞 한강은 ‘빙호(氷湖)’로 불렸다(『대관재난고』). 서빙고역 자리에 있던 나루는 동작진과 대안을 이뤘다. 예전에는 한강대로가 물길이어서 숭례문을 나와 남산 자락을 타고 이태원(후암동)에서 둔지산 고갯길을 내려가 서빙고 나루터에 닿았다(『임하필기』 등). 강 남쪽의 왕릉이나 묘(廟)에 제사 지낼 때 이 나루에서 신위나 제물을 싣고 갔다(『일성록』 영조 47년, 『정조실록』 12년,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등). 제향에 쓸 빙고의 얼음도 함께였다.
서빙고는 8개의 저장고를 갖추고 모두 13만4974정의 얼음을 보관했다. 이 가운데 2만2623정은 왕족과 백관의 몫이었다. 비빈 1만100정, 왕자·공주 660정, 시녀·내시 900정, 종친과 정2품 이상 백관 9144정, 관원 1800정 등이었다(『전율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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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고는 돌을 이용해 반지하에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돌 틈은 진흙과 회를 바르고 지붕은 흙과 짚 위에 기와를 얹은 뒤 그 위에 다시 이엉을 덮어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바닥에는 배수시설을 둬 습기가 차지 않도록 조처했다(『만기요람』). 이엉은 한강 변 난지도 일대에 무성하던 갈대를 사용했다(『인조실록』 4년 7월 18일 등).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구보는 영조 때 지은 반원 모양의 경주 석빙고에서 그 모습을 짐작한다.
빙고는 예조 소속으로서 제조를 수장으로 6품에서 8품 사이인 별감·별제·별장 등이 군인들을 지휘해 얼음의 채취와 보존, 납품을 처리했다(『대전회통』). 동빙고 간수는 제례를 주관하던 봉상시가 맡았다(『연려실기술』). 빙고가 얼음 갈무리를 소홀히 하면 승지들이 검색에 나서 규찰했다(『세조실록』 7년 12월 11일 등). 비싼 재화이다 보니 관원들이 치수를 트집 잡아 벌빙군에 갑질을 하거나 수량을 놓고 농간을 부리는 사례도 잦았다(『정조실록』 원년 12월 18일 등). 얼음의 현황을 살펴 사용량을 국왕이 월별로 지정하기도 했다(『정조실록』 2년 12월 21일 등). 구보는 얼음과 관련한 인식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음을 감지한다.
얼음을 집어넣고 꺼낼 때는 의례를 행했다. 사한단(司寒壇)이 2월 춘분이면 동빙고 빙실 북쪽 개빙제소에서 북방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개빙제(開氷祭)를, 12월 상순엔 순조로운 보관을 빌며 장빙제(藏氷祭)를 지냈다. 채빙에 앞서 춥기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와 얼음이 잘 얼기를 비는 동빙제(凍氷祭)도 했다(『육전조례』). 얼음 생산과 보관을 위해 4번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채빙은 중노동이었다. 청계천 중랑천 한강 등에서 음력 12월과 1월 사이에 작업했다. 두께 20㎝ 이상일 때 채취를 했다. 군사 외에 마을 주민들도 동원됐는데, 이들을 ‘빙척’이라고 불렀다. 얼음에 칡끈을 동여매 25명이 하루에 50정을 져 날랐다(『승정원일기』 인조 17년 6월 27일).
“동지섣달 쌓인 음기 뼛속 엄습한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로 들어가고 /밤이면 망치 끌 챙겨 들고 강 한복판에 모이누나 /정강이 드러난 짧은 옷에 짚신조차 신지 않아 /강상 매서운 바람에 손가락 떨어질 듯.”(하략, 『농암집』)
두 빙고 외에 왕실 전용 내빙고가 따로 궁궐에 있었다. 서빙고의 3분의 1 크기였다. 창덕궁 요금문 안쪽에 위치했다. 세종 때 예조판서 신상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음식 재료들이 여름 더위에 상할 것을 우려한 방지시설이었다. 봄철 한강 웅어는 멸칫과 생선이어서 궁내 조리기구인 사옹원이 잡는 즉시 서빙고의 얼음으로 저장했다. 강에서 먼 내빙고로 얼음을 실어 나르고 보관하는 것은 외빙고보다 ‘백배나 힘들었다’. 말을 동원하고 운반 순서를 앞에 뒀다(『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2월 7일).
다산 정약용이 궐내 제빙 아이디어를 냈다. 궁궐 안 응달진 곳에다 큰 움을 파서 사방을 돌로 쌓고 틈을 회로 바르고, 대한 열흘쯤 뒤 몹시 추운 날 샘물을 길어다가 움 안에 쏟아 부으면 얼음을 만들 수 있다는 방안이었다. 벽에 틈이 없어 외풍이 새어 들지 않아 날씨가 따뜻해져도 얼음이 녹지 않으며 보존상태도 극히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경세유표』 ‘치관지속’). 구보는 다산이 이과적 두뇌가 있는 천재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제안에 그치고 말았다.
세종과 성종 대에 빙고제도를 정비했고, 임진왜란 이후엔 오리 이원익이 영의정으로서 빙고의 재건·확충을 관리·감독했다(『경국대전』). 면암 최익현의 조부 등 조선의 많은 문인이 과거에 합격한 뒤 빙고의 별검과 별제를 거친 기록들(『갈암집』 『계곡집』 등)을 보면서 구보는 빙고의 위상이 높았음을 파악한다. 얼음의 최대 용도는 피서나 냉장이 아니라 제사였다. 『경모궁의궤』에 첫 수확을 끝내고 햇곡식으로 제사 지내는 천신(薦新) 때의 절차가 삭령(朔令)별로 기술돼 있다. 2월 제사 때는 “빙고가 얼음 1편(片)을 두(豆: 제기)에 담는다”고 기재해 얼음을 제단에 올렸음을 알게 한다.
빙고는 19세기 후반 들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재래식 장사꾼들도 북한강·임진강 등에서 얼음을 실어 와 팔았고, 제빙회사들이 생겨나면서 소용을 잃어 1896년 폐지됐다. 몹시도 더웠던 여름, 동작에서 구보는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조선의 얼음 풍속을 아스라이 그려 본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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