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29주기가 되는 날이다. 전군 유일의 예비전력 관련 교육기관에서 근무하면서 무장공비의 잔혹함과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민을 위해 헌신하신 선배 전우들, 예비군의 활약을 기억하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96년 9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무장공비 26명을 소탕하기 위해 국군, 예비군, 경찰에 의해 49일간 실시된 작전이다. 무장공비들은 9월 17일 사전 침투해 강릉비행장, 주요 도로망 등의 정찰임무를 마치고 9월 18일 북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잠수함이 해안에 접근하던 중 암초에 부딪혀 선체 바닥과 스크루가 파손돼 기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증거 인멸을 위해 잠수함에 불을 지르고 육상으로 도주하면서 아군에 발각됐다. 이는 전술적 수단인 잠수함으로 대남공작 활동을 한다는 것을 인지한 최초의 사건이며, 단순한 간첩이나 포섭을 통한 대남공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에 강원도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 연인원 150만여 명, 지역방위 예비군 28만여 명이 동원돼 탐색·격멸작전을 전개했다. 작전 중 무장공비는 특수훈련을 받지 않은 잠수함 승조원의 도주 속도가 느려 아군에 추격당할 것을 우려해 청학산 정상 부근에서 11명의 동료를 무참히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했다. 49일간의 끈질긴 추격작전 끝에 침투한 무장공비 1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으나 작전을 펼치면서 드러난 문제점과 보완사항도 다수 식별됐다.
특히 예비군은 작전 1일 차 응소율이 32%로 저조했다. 자원 관리 소홀로 주민등록지와 실거주지가 상이했고 비상연락망 최신화, 예비군 전출·출입자 현황 파악이 미흡해 초기 작전 때 봉쇄선 형성에 어려움을 겪어 작전지역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작전 중에는 평소 작계지역 교육훈련이 부족해 투입해야 할 목진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와 주야간 비전술적 행동으로 적에게 아군의 위치를 노출하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지방자치단체와 협조가 미흡해 급식 등 지속지원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997년 1월 13일에는 통합방위법을 제정해 민·관·군·경 통합방위 협조기구 운영의 법적 보장, 동원 응소율 향상을 위한 응소 기준시간 설정, 예비군대원 자원결산체계 확립, 예비군부대 지휘요원 교육, 군기 문란자 처벌기준 강화 등 문제로 지적됐던 부분을 보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근의 대남도발 양상은 아군의 해안감시망 발달과 경계시스템 과학화로 밀입국 및 탈북 가장 침투, 제3국으로의 우회 침투, 포섭 활동, 소형 무인기 정찰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사이버전, 인공지능, 빅데이터의 발달로 더 이상 무장공비의 침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섣부른 판단이며, 우리가 대비하지 않은 느슨한 틈을 적은 반드시 역이용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우리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튼튼한 국방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받아 안보를 튼튼히 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는 게 선배 전우들의 헌신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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