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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목 놓아 만세를 외치다

입력 2025. 09. 09   16:50
업데이트 2025. 09. 0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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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전국 독립운동기념관 탐방
⑧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신형식 신언진 신관순 
송정현 송기주 송기옥
양성도 양기철 양기준

군산 항일운동 정신적 요람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교사 박연세 등 거사 모의
만세운동 총 28회 연인원 3만1500명 참여
1인당 3~4회 이상 목숨 걸고 만세 외친 셈
전국 적산가옥 철거 당시 170여 채 보존키로
“치욕도 역사…후대 위한 교육장으로 삼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전북 군산시 구암동 3·1운동 역사공원 초입. 낮은 담벼락에 새겨진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익숙한 경구이지만, 유독 이곳 군산에서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이 도시가 품은 기억의 무게 때문이다. 군산은 일제 수탈과 항거라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외면하지 않고 후대의 거울로 삼고 있었다. 그 심장부에는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전북 군산시 구암동 3·1운동 역사공원 입구.
전북 군산시 구암동 3·1운동 역사공원 입구.


일제 수탈 속 싹튼 저항의식

기념관에서 만난 조재윤 문화관광해설사는 “6년째 기념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곳에 해설하러 나오는 날은 소풍 가는 것처럼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며 환한 웃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사를 전공하고 교편을 잡았던 그는 퇴직 후 우연한 기회에 문화관광해설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으로 80여 년 전 독립운동이 펼쳐진 군산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19년 군산의 저항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899년 강제개항 이후 군산은 사실상 일본인의 도시였다. 일제는 조선의 땅값이 자국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을 기회 삼아 조직적으로 토지를 수탈했다. 미야자키, 구마모토 등 일본인 대지주 농장이 들어섰고 호남평야의 쌀은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군산항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주여건이 좋은 평지는 모두 일본인의 차지였고, 한국인은 산비탈에 토막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1919년 당시 군산의 인구는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많을 정도로 기형적인 구조였다. 일본인의 일상적인 천시와 착취는 군산 사람들의 가슴속에 서슬 퍼런 저항의식을 심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식의 씨앗을 뿌린 이가 있었다. 1895년 군산에 온 미국 남장로회 소속 윌리엄 전킨(한국 이름 전위렴) 선교사였다. 그는 교육과 의료로 민족계몽에 힘썼다. 그가 세운 영명학교는 훗날 군산 항일운동의 정신적 요람이 됐다.


군산 3·5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이 적힌 조형물.
군산 3·5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이 적힌 조형물.

 

군산 3·5만세운동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조재윤 문화관광해설사.
군산 3·5만세운동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조재윤 문화관광해설사.


3월 5일, 마침내 터져 나온 함성

1919년 2월 28일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200장을 품에 안고 군산으로 향했다. 그는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 이두열 등과 함께 군산 장날인 3월 6일을 거사일로 잡고 비밀리에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를 이틀 앞둔 3월 4일 밤 밀고로 계획이 탄로 나면서 박연세, 이두열 두 교사가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거사는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남은 교사와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른 교사 김윤실의 주도로 긴급회의를 하고, 거사를 하루 앞당겨 3월 5일 결행하기로 결의했다.

3월 5일 오후 영명학교 운동장에 교사 20여 명과 학생 100여 명이 모였다. 학생들은 밤새 만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눠 줬다.

이윽고 한 교사의 “대한독립 만세!” 선창이 있자 운동장에 모인 모두가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이끄는 대열은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향했다. 서래장터에 이르자 장에 나왔던 시민들이 합세하며 시위대는 순식간에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두 교사가 연행된 군산경찰서로 향했고, 경찰서 앞에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들.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들.

 

군산 3·5만세운동 피해 현황.
군산 3·5만세운동 피해 현황.



만세운동이 펼쳐진 법정


3·5만세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3월 14일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 70여 명이 동맹휴학으로 항거했고 학생이던 이남율, 김수남 등은 같은 달 23일 밤 “독립운동에 저해되는 학교를 불태우겠다”며 교정에 불을 질렀다.

저항의 열기는 3월 말, 3·5만세운동 주동자들의 재판을 앞두고 절정에 달했다. 3월 30일 밤 수백 명의 군중이 횃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맞섰고, 일본인 거류민까지 목총과 칼로 무장한 채 시위대를 공격하며 시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다음 날인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공판은 또 다른 만세장이었다.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이 법정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청석에서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법정 안팎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울분 섞인 외침이었다. 일제는 법정에서 만세를 외친 이들마저 즉결 체포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3월 5일부터 5월까지 군산의 만세운동은 총 28회, 연인원 3만1500여 명이 참여했다. 당시 군산의 한국인 인구가 6500여 명이었으니 1인당 서너 번 이상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친 셈이다. 이 과정에서 53명이 목숨을 잃고 195명이 투옥됐다.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전경.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전경.

 

군산 3·5만세운동 기념비.
군산 3·5만세운동 기념비.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

군산이 특별한 이유는 이 아픈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전국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철거될 때 군산은 170여 채의 일본식 가옥을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조 해설사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무조건 숨기기보다 보존해 후대를 위한 교육장으로 삼자는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기념관은 이러한 ‘철학’이 집약된 공간이다. 단순한 유물 전시를 넘어 처절했던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2층 체험관에는 박연세 선생이 섰던 재판정이 재현돼 있다. 재판정 의자에 앉으면 센서가 사람을 인식해 당시 박 선생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스피커로 들려준다. 옆에는 목판으로 독립선언서를 직접 등사하며 그날의 결의를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

3층에서는 독립군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인기다. 특히 포토존 창밖으로 일제가 쌀을 실어 나르던 항구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일본 순사들을 피하는 ‘겨레의 함성’ 체험, 태극기 퍼즐 맞추기와 탁본체험 등은 놀이를 통해 역사를 마주하게 한다.

기념관은 추모공간만이 아니었다. 항쟁의 현장을 보존하고 아픔의 기록을 마주하며 체험을 하면서 미래 세대에게 교훈을 전달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 현장’이었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거울삼아 더 나은 미래를 열려는 기념관과 군산의 노력은 우리에게 역사를 기억하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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