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이 고개 넘으면 선친 묘 못 볼 텐데…정조는 길따라 나무 심어 넋 달랬다

입력 2025. 09. 04   15:23
업데이트 2025. 09. 0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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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안양·의왕·수원, 정조의 효심지로

사도세자의 묘 자리한 수원 ‘현륭원’
참배 후 한양 돌아갈 때 넘던 고개
‘느릴 지(遲)’ 두 번 새겨 ‘지지대’라 불려
사후에도 부친 곁으로 지극한 효심

상인들 배로 ‘주교’ 만들어 한강 넘고
화성행 새 길 위해 안양에 만안교 건설
선친 부정적 이미지 씻어 주려 노력

 

경기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파장동을 잇는 고개 ‘지지대’. 고개 노송들에는 표찰이 붙어 있다. 노송들 사이로 화성을 바라보는 정조대왕 동상이 보인다. 필자 제공
경기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파장동을 잇는 고개 ‘지지대’. 고개 노송들에는 표찰이 붙어 있다. 노송들 사이로 화성을 바라보는 정조대왕 동상이 보인다. 필자 제공

 


경기 안양시 석수동의 만안교는 1795년 정조 19년에 정조의 화성행을 위해 건설됐다. 7개의 수문을 둔 아치형 다리다. 폭 8m에 길이 31.2m, 높이 6m다.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총책임을 맡아 석 달 걸려 만들었다. 관할인 수원을 비롯해 강화와 개성의 유수(군수)까지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년) 10월 7일 선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겼다. 지금의 현륭원이다. 가까이에는 용주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원행 때마다 한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이듬해인 1790년 7월 배다리(주교·舟橋) 제도를 정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어 시행했다(『정조실록』 14년 7월 1일). 다산 정약용의 아이디어였다(『자찬묘지명』). 경강(京江) 상인들 소유의 배를 동원해 서로 묶어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연결한 배다리였다.

한강을 주교로 건넌 후에는 노량진의 행궁 용양봉저정에서 잠시 휴식한 후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거치는 코스를 이용했으나 고갯길이 많아 불편한데다 사도세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가 과천에 있어 정조의 심사가 편치 않았던 까닭이 작용했다.

정조는 즉위년에 사도세자의 대행대왕 시절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려는 계획에 반기를 들어 무산시켰던 김상로의 관작을 추탈한 데 이어 김약로 형제를 탄핵하다가 유배당한 이존중을 복위시켜 대제학에 추증한 바 있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30일, 4월 13일).

그런 연유로 과천 길을 피해 지금의 시흥대로를 지나 시흥 행궁에서 하루를 묵고선 수원으로 향하는 코스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만 년 동안 무사하기를 기원한’ 만안교(萬安橋)다. 안양천을 건너려는 방편이었다. 원래는 지금의 안양대교 사거리 부근에 놓였던 것을 1985년 도로를 내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구보는 안양대교에 서서 사위를 둘러보며 옛 만안교가 지금보다 더 넓은 하천을 가로지르던 다리였음을 상상해 본다.

 

이 다리는 경기 관찰사 서용보가 과천 경로를 불편해하던 정조의 뜻을 헤아려 새 코스를 개발하며 기획했다. 그는 이미 임금의 내락도 받은 상태였다. 당시 정조의 명을 받아 경기 암행어사를 맡았던 다산 정약용이 저간의 사정을 모른 채 “멀쩡한 길을 두고 또 길을 내느라 백성을 불편하게 한다”는 경기도민들의 불만을 보고서에 올림으로써 건설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이에 서용보는 서유방에게 관찰사직을 넘기게 된다. 총책임자가 서유방으로 기록된 연유다.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평생에 걸쳐 다산을 괴롭힌다. 만안교 건설 원 기획자의 억하심정은 오래 계속됐지만, 그 덕에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같은 명저를 집필할 시간을 벌었으니 시간의 성격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구보는 생각한다. 이런 사연을 안은 채 만안교는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경기 안양시 석수동의 만안교는 1795년 정조 19년에 정조의 화성행을 위해 건설됐다. ‘만 년 동안 무사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있다. 필자 제공
경기 안양시 석수동의 만안교는 1795년 정조 19년에 정조의 화성행을 위해 건설됐다. ‘만 년 동안 무사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있다. 필자 제공



효심지로에는 의왕(義旺), 왕송(旺松), 왕곡(旺谷), 왕림(旺臨) 등 ‘왕’ 자가 붙은 지명이 여럿 보인다. 모두가 정조와 연관을 갖는다. ‘王’ 자를 사가에서 쓸 수 없어 ‘旺’으로 대체했다. 왕곡 마을은 행궁에 머물다 방문한 마을로, 촌로들을 초치해 위로한 사연을 갖는다. 경기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을 잇는 고개는 ‘지지대(遲遲臺)’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역시 정조의 스토리가 반영된 이름이다.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한 후 한양으로 돌아갈 때마다 이 고개를 넘으면서 아쉬움 때문에 한참을 지체한 까닭에 ‘느릴 지(遲)’ 자를 두 개나 붙였다는 것이다(『의왕의 지명유래』).

고갯마루에는 ‘지지대비’라는 비석이 있다. 아버지 정조의 효심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아들 순조가 1807년 부왕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아 세웠다. 구보는 정조와 순조 두 부자의 효심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정조의 효심은 한둘이 아니다. 1776년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고치고 묘명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했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13년 후에는 현륭원으로 다시 고치면서 묘를 양주에서 화성으로 옮겼다. 자신도 사후 아버지 곁에 묻혔다. 1790년 이 지지대서부터 아버지 묘까지 경수 국도를 따라 5㎞ 구간에 나무를 촘촘히 심어 선친의 넋을 위로했다. 1795년까지 내탕금을 지급해 소나무·회화나무·상수리·능수버들 등 수천 그루를 심었다.

집계를 맡아 『정리통고』의 ‘식목부’에 식목 수를 정리한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도 ‘식목 연표’ 초본을 기록하며 그 소회를 밝혔다. “침원(寢園)에 대한 성상(聖上)의 효심이 이처럼 정성스러웠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 소나무들은 전란과 세월 탓에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110그루 정도가 남아 ‘노송지대’를 이루며 197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생존한 노송들은 표찰을 달고 도열해 있다.

비명에 간 선친 사도세자에 대해 정조는 항상 슬픔의 응어리를 안고 지냈다. 그래서 아버지의 탄생을 기뻐하며 읊은 박문수의 시에 늘 특별한 애정을 뒀다. 1795년 3월 7일의 행차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정조는 우의정 채제공 등을 대동하고 인왕산 세심대(洗心臺)에 올랐다. 왕은 60세가 넘은 노신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해 산길 오르기에 편하도록 배려했다. 옥류천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세심대에 이르자 말했다. “옛날 을묘년(1735년)에 나라의 경사(사도세자 탄생)가 있고 나서 영성군(박문수)이 필운대에 올라 기뻐하면서 ‘해마다 태평주 들며 길이 취하리’라는 구절을 읊었다. 그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다.”

왕은 화성의 장락당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며 선친에게 ‘장조(莊祖)’라는 존호를 바치던 날에도 귀궁하는 길에 세심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운당 유득공이 정조의 심사를 헤아려 “올해 특별히 꽃이 난만한 것은 능행을 다녀온 아들의 효심 때문”이라고 화답했다. 닷새 뒤 정조는 다시 이곳을 찾는다. 특별히 전·현직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날은 “현악기 연주 소리에 온 도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고운당필기』는 전한다.

구보는 상기 에피소드들에서 선친에게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 주려는 정조의 애씀을 감지한다. 참으로 효심 깊은 아들이었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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