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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깃든 한복…새 시대 알리는 양복, 시대의 무게 엮어 삶을 짜다

입력 2025. 08. 25   16:21
업데이트 2025. 08. 2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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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광복 80년, 옷에 새겨진 기억 

1945년 8월 광복의 그날 이후
한복·양장 동대문·종로 거리 뒤섞이고
경찰·학교 제복 일본→미국식으로 교체
군복·공군 기체에 태극 문양 새겨져
‘옷’은 단순히 덧입는 천 아닌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근거

 

광복 80년을 맞는 달이다. 감개무량하다. 해방의 그날 이후, 거리를 가득 채운 옷차림은 시대의 변화와 그 숨결을 누구보다 먼저 보여줬다. 낡은 저고리와 해진 구두, 군화와 페도라, 군용 헬멧이 뒤섞인 거리를 선배 세대가 걸어갔다. 그 풍경 속에 해방기의 기억이, 곧 우리가 걸어온 역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번 칼럼에선 그 옷들을 돌아보며 해방기의 숨결과 기억을 따라가 본다.


뒤섞인 옷, 새 시대의 출발

1945년 여름, 거리는 달라졌다. 일본제국 제복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대신 오랫동안 장롱 속에 있던 한복이 햇빛을 보기 시작했다. 동대문과 종로의 양복점에서는 야스이(安井) 재봉틀이 밤새 돌아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수용으로 사용되던 기계가 새 시대의 옷을 짓는 도구가 된 것이다. 원단이 부족하면 헌 옷을 뜯어 다시 꿰맸다. 여성들은 한복과 양장을 오가며 입었고, 저고리 대신 서양식 블라우스를 매치한 차림도 흔했다. 미군이 보급한 담요와 포대는 코트와 스커트로 다시 태어났다. 신발 또한 고무신, 군화, 구두가 한 거리에 어우러졌다. 옷은 한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서구 물자의 유입과 전통의 뿌리

1945년 가을, 인천항과 부산항에 미군 수송선이 닿으며 모포, 니트, 양복 원단, 모자, 가죽구두 같은 물자가 쏟아졌다. PX는 미군과 통역, 하역 노동자, 상인으로 붐볐고 일부는 원조품으로, 일부는 ‘방출품’으로 시중에 퍼졌다. 종로와 명동의 양복점, 남대문 포목상들은 이 물건으로 진열대를 채웠다. 공무원과 정치인은 주로 양복을 입었지만 장례와 제례 같은 전통의례에는 한복이 여전히 제 역할을 했다. 거리는 두 흐름이 나란히 이어졌다.

당시 인물들의 차림새도 시대를 반영했다. 드라마 ‘야인시대’로 널리 알려진 김두한 전 의원은 페도라와 양복으로 신흥도시 세력의 상징처럼 거리를 장악했다. 김구는 흰 두루마기와 갓으로 독립운동의 기억과 대륙의 인연을 떠올리게 했다. 이승만은 건국 선포 후 서구식 양복 차림으로 외교 무대에 섰다. 세 사람의 옷차림은 해방 조국 속 서로 다른 세계관을 드러냈다.


1946년 민주의원회의를 마치고 악수를 나누는 이승만(왼쪽)과 김구.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6년 민주의원회의를 마치고 악수를 나누는 이승만(왼쪽)과 김구.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복에서 생활복으로 

해가 지나며 일본식 제복은 자취를 감췄다. 1946년 미군정 경무부는 경찰 제복을 미국식으로 바꿨다. 챙이 넓은 모자, 네이비블루 색상 더블브레스티드 외투가 새로 보급됐다. 국방경비대(훗날 국군)는 카키색 야전복과 M1 헬멧을 착용했다. 해상 방위 조직은 이 미국식 규격을 전면 수용했다. 부산항과 인천항 창고에는 방출품이 산처럼 쌓였다.

학교 제복도 바뀌었다. 경성고보는 일본군 상의 형태를 버리고 은색 단추를 단 미국식 제복으로 바꿨다. 여학생 세일러복은 그대로 남았다. 지역에 따라 교체 속도는 달랐다. 대구와 광주는 미군 부대가 가까워 보급이 빨랐지만 강원 산간은 몇 년간 옛 제복이 남았다. 곧 이 변화는 민간의 옷장으로 흘러갔다. 종로와 남대문 시장의 ‘방출품’ 가게에는 미군 야전 재킷과 빗물에 강한 트렌치코트, 카키색 항공 점퍼가 걸렸고, 천장에는 가죽끈이 달린 군용 더플백이 매달렸다.

겨울이면 군용 모포를 잘라 만든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종로 네거리를 가득 메웠다. 전투화는 눈길에도 미끄러지지 않아 인기가 있었다. 튼튼한 원단과 포켓 등 실용적인 디테일은 도심 복식에 깊게 스며들었고, 군대에서 태어난 옷들이 시장과 거리를 거쳐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다. 군복의 변화가 곧 생활복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태극과 복장의 결합

해방 직후 나라는 먼저 깃발을 정비했다. 1948년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했고, 같은 해 런던 올림픽에선 선수단이 태극기를 들고 당당히 입장했다. 공식 복장에는 왼쪽 가슴에 배지와 표시가 달렸다. 독립기념관에 남은 당시 선수 셔츠엔 태극과 오륜 표식이 함께 박혀 있다. 스포츠 무대에서 해방의 상징이 다시 걸렸다. 1949년 1월 이승만 정부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해 같은 해 10월 15일 제작 기준을 공표했다. 태극기가 규격을 얻은 순간이었다.

군복에도 태극 문양이 새겨졌다. 1949년 창설된 공군은 기체에 태극 라운델(Roundel·군용기가 국적 또는 소속을 나타내면서 피아 식별을 목적으로 붙이거나 새기는 문양)을, 장병 모자와 여름용 카키 셔츠 가슴에 붉고 푸른 원을 달았다. 의례복에는 태극 배지를 단정히 꽂았고, 행진 때는 태극 완장을 차고 걸었다. 견장·단추·허리 벨트까지 반듯하게 맞춘 병사들 사이로 태극 문양이 일제히 반짝였다. 태극은 단순히 깃발에만 있지 않고 거리와 행사복, 유니폼에 함께 걸어 다녔다.


이념과 복식의 갈림길 

1950년 한반도는 이념의 전선으로 갈라졌다. 북한군이 들어온 도시에는 인민복 차림의 정치지도원과 군인이 거리 곳곳에 섰다. 회색 모자와 홍색 완장은 새로운 권력을 상징했다. 남쪽에서 북쪽 군복과 장비를 노획해 입은 국군 병사, 북쪽에서 미군 방출품을 주워 걸친 주민 등 전선은 혼란스러운 혼용의 장이 되기도 했다.

전쟁은 옷차림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동시에 이념의 옷을 각인시켰다. 옷은 더 이상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식이 됐다.


역사 속에서 되새기는 오늘 

오늘의 대한민국은 다시 열강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긴장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지난 80년 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떠올리면 흰 두루마기와 갓, 네이비블루 양복, 카키색 야전복, 그리고 태극 완장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녔음에도 결국은 이 나라를 오늘에 이르게 한 흔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80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성찰의 순간이다. 우리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 옷에 담긴 선택과 갈등, 그리고 시대의 무게가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야 한다. 옷은 단순히 덧입는 천이 아니라 역사의 길 위에서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증거였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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