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의사 이태준이 의술 펼치며 조국 독립의 꿈 키운 곳

입력 2025. 08. 21   15:45
업데이트 2025. 08. 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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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몽골 울란바토르 

한국 최초 의사 김필순 만나 의사의 길
치료하던 안창호 권유 청년학우회 가입
무관학교 설립 의지 김규식 따라 몽골로
7년간 근대 의술 베풀며 국왕 주치의 돼
임시정부에 자금 지원하고 의열단 가입
러 백군에게 볼셰비키파로 몰려 피살

 

몽골 울란바토르 근교 테를지. 김규식이 이태준과 함께 군관학교를 세우려 했던 곳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근교 테를지. 김규식이 이태준과 함께 군관학교를 세우려 했던 곳이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 크기로서 지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광활한 나라다. 1910년대 이 초원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국 청년이 있었다. 대암 이태준(1883~1921)이다. 

1921년 가을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인 몽양 여운형은 러시아로 가던 중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체류하게 되자 남산 건너편 구릉 한복판에 있던 이태준의 묘를 찾아 애도했다. “이 땅에 오직 하나뿐인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몽골여행기』).”

대암은 세브란스병원 출신 의사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기념공원이 울란바토르에 마련돼 있다. 몽골인들의 성산(聖山)인 복드산 자락이다. 시내를 조망하는 자이승 전망대 바로 옆이어서 한국 관광객이 매일 200여 명씩 찾는다.

기념관 안에는 이태준이 1919년 국왕으로부터 받은 훈장이 전시돼 있다. 당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이태준은 1914년부터 7년간 몽골에 머무르며 바이러스성 감염병과 염증 등을 치료하는 의술을 폈다. 샤머니즘에 의존해 병을 치료하던 몽골인들에게 이태준이 구사한 신식 의술은 경이로웠다. 당시 울란바토르는 인구가 50만 명에 불과해 그의 등장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국왕 복드 칸이 그를 주치의로 삼았다.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려던 국왕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던 이태준과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태준은 시 동남쪽에 있던 외국인병원 구역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차렸다가 어의가 되면서 궁궐 주변으로 옮겨온 듯 보인다. 몽골 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신의(神醫)’로 여겨졌던 이태준의 전설을 들려준다. 알지 못했던 인물을 외국에 와서야 발견한 관광객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구보는 한국 병원 ‘아가페’에 하루 60여 명씩의 혈관 질환 환자들이 찾는 사실에서 그의 전설이 여전히 역할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한국 의술에 대한 현지의 신뢰가 100년을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이태준의 초상화. 유일하게 남은 졸업사진을 참고했다. 이태준 기념관 소장
이태준의 초상화. 유일하게 남은 졸업사진을 참고했다. 이태준 기념관 소장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공원.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공원.

 

이태준 기념공원 내 이태준 가묘.원묘는 유실됐다.
이태준 기념공원 내 이태준 가묘.원묘는 유실됐다.

 


이태준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출생해 문중의 서당에서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4서 3경을 모두 학습했다. 인천 이씨 대종회에 따르면 이태준은 19세에 결혼했으나 가족을 둔 채 1906년 서울로 갔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듬해였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내린 종점 경성역 서대문 정거장 부근을 배회하다가 발견한 ‘김씨형제상회’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인삼을 취급하는 가게였는데 함안에서 친척의 한약방 일을 도운 경력이 도움이 됐다.

이태준은 거기에서 평생의 인연이 되는 김필순을 만난다. 김필순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중에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명 가운데 한 명이 된다. 그의 삶은 이태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게에서 견문을 넓히고 귀동냥을 한 이태준은 김필순을 좇아 1907년 의사의 길에 들어선다. 고문 후유증 치료를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던 도산 안창호를 치료하면서 그의 권유로 비밀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공화주의적 정치 이념을 갖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현실 앞에서 이태준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1911년 6월 의학교를 졸업하고 수련의로 근무하다가 1911년 가을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망명길에 나선다. 군주제를 탈피해 공화정을 이룬 신해혁명이 한국의 롤모델이라고 여겨 적극 동참하고 싶어 했다. 위생대로 봉사하기를 원했으나 이민족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태준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난징 기독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몽골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는 김규식의 동행 제의를 받아들여 1913년 몽골로 갔다.

지금은 관광지가 됐지만 허허벌판이던 울란바토르 근교의 테를지로 가서 탐사 작업에 나섰다. 구보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그 아래 화강암 산, 그리고 녹색 강물이 펼쳐지는 테를지 강변의 풍경 속에서 이태준이 고향 함안을 떠올리며 고단한 심신을 위로받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세우려던 무관학교가 예산 문제로 무산되자 울란바토르에 ‘동의(同義)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경제력을 확보하고 지역 유력자들과의 관계망도 만들어 독립운동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태준은 국왕을 비롯해 유력자들로부터 사례로 받은 돈은 임시정부를 위해 썼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려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참가하는 김규식에게 2만 달러(약 5000만 원)를 경비로 지원했고, 코민테른에게 독립자금을 얻으려 모스크바로 가는 한형권에게도 여비를 지원했다. 한형권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아낸다.

이태준은 1919년 이동휘가 창당한 한인사회당에 가입해 모스크바 코민테른이 제공하는 금괴를 상하이 임시정부로 운반하는 일에 동참한다. 이 일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이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에도 가입한다. 자기 운전기사로서 우수한 폭탄 제조가이던 헝가리 군인 출신 마자르를 의열단에 연계해 질 좋은 폭탄을 만드는 데 결정적 도움도 제공했다(『대암 이태준』).

이태준은 1921년 적백(赤白)내전에서 적군에 쫓겨 시베리아에 나타난 러시아 백군에게 볼셰비키파로 몰려 처형당한다. 아시아기마사단 중장 운게른 슈테른베르크(1886~1921) 남작은 철저한 왕정파로서 볼셰비키 동조자는 어떠한 변명도 허용치 않고 현장에서 처형했다(『Thebloody white Baron』). 이태준도 친 코민테른 활동 때문에 변을 당했다. 이태준의 시신은 복드산 자락에 묻혔다가 1956년 자이승 기념탑 건립 과정에서 유실됐다.

구보는 20세기 초반의 정치 지형들, 을사늑약·경술국치·신해혁명·러시아 혁명 등이 이태준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고 여긴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공동체를 위하는 일에 몸을 던진 순간 이미 예고된 운명이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구보는 자이승 전망대에서 이태준 기념공원을 내려다보며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몽골 땅에서도 전개됐으며, 의사로서 인류애를 구현함으로써 조국의 위명을 선양했고, 자신의 위치에서 광복을 위해 이바지할 일을 끝없이 찾았던,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확인한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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