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다시 찾은 서로마제국 수도 ‘황금빛 모자이크’로 빛내다

입력 2025. 08. 20   17:33
업데이트 2025. 08. 2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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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이탈리아 고도(古都) 라벤나의 성당들

동고트족에 빼앗겼던 이탈리아반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명으로 되찾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떠올라
누오보 등 8개 성당 세계문화유산에
산 비탈레, 비잔티움 예술의 꽃 평가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외관 모습. 사진=위키백과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외관 모습. 사진=위키백과


현대에 접어들어 빠르게 약화하고는 있지만, 누가 뭐래도 서양은 그리스도교 사회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이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풍성하다. 통상 교회 건물을 꼽을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트르담이나 쾰른성당처럼 높은 첨탑의 중세 고딕건축을 떠올린다. 하지만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성당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깊다. 특히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곳곳에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이 들어섰다. 이 시기의 대표 도시가 바로 이탈리아 북동부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고도(古都) 라벤나(Ravenna)다.

오늘날 이곳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물로 이미 30년 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8개의 성당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반도 중심인 로마에서 볼 때 북동부 오지에 있는 라벤나가 역사 속에서 본격 주목을 받은 것은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난 이후였다. 혼란기에 이탈리아반도를 차지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東)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왕(454~526)은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전성기를 누렸다.

그렇다면 동고트족은 어떻게 이탈리아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을까? 로마제국이 혼란과 권력 공백 상태에 처하자 이를 틈 타 여러 게르만족 집단이 몰려 들어왔다. 이들 중 테오도리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이끈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반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동고트족은 원래 흑해 북쪽 지역에 거주하던 고트족의 한 분파였다. 민족 이동 시기에 로마제국의 히스파니아 속주를 차지한 서(西)고트족과 함께 고대 로마 세계를 위협했던 주요 게르만족 부족이었다.

테오도리크는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질 신분으로 체류하며 로마 문화와 정치체제를 익혔다. 명석했던 그는 488년 동로마제국 제논 황제로부터 오도아케르를 축출하고, 서로마 지역을 탈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를 명분 삼아 동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해 493년 임무를 완수했다. 얼마 후 동고트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해 526년 사망할 때까지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했다.

하지만 동고트 왕국은 단명했다. 테오도리크가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난 538년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을 받은 명장 벨리사리우스(500?~565)에 의해 멸망했다. 원래 트라키아 지방 하급귀족 출신이던 벨리사리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에 더해 특히 532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발생한 ‘니카 반란’을 진압하면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곧 황제의 전폭적 신임 아래 서로마 재정복 군사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일명 고트전쟁(535~554)으로 알려진 원정은 535년부터 약 2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반도 남부로부터 치고 올라온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제국 군대가 538년 로마를 완전히 장악한 후 이듬해 라벤나를 공략해 540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라벤나의 주인은 재차 바뀌었다.

이때부터 라벤나는 정치적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빠르게 발전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곳을 서로마 지역 전진기지이자 서방 통치의 중심 도시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원래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402~476)였던 라벤나는 5세기부터 8세기까지 동로마제국의 서방 로마제국 수도로서 기능을 했다. 이 시기 동안 라벤나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현존하는 대부분 성당도 주로 5~6세기에 걸쳐 건립됐다. 이때 다양한 양식의 성당들이 신축돼 기존 건축물에 더해졌다. 신축 성당들은 자연스럽게 당시 동로마제국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 및 모자이크 장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수준을 인정받은 라벤나 소재 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성프란체스코 성당 등 총 8개의 성당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산 비탈레 성당이 최고의 명성을 떨쳐왔다.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기인 526~547년에 황제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건립됐다. 원래 이 성당은 2세기경 라벤나에서 순교한 로마군인 비탈레 성인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산 비탈레 성당은 라벤나가 한때 동로마제국의 서방 행정 중심지였음을 상징이라도 하듯, 모자이크 장식과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비잔티움 예술과 건축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라벤나에 있는 비잔티움식 영묘 내부. 사진=위키백과
라벤나에 있는 비잔티움식 영묘 내부. 사진=위키백과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모자이크화. 사진=위키백과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모자이크화. 사진=위키백과

 

산 비탈레 성당 내부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수행원들을 묘사한 모자이크화. 사진=위키백과
산 비탈레 성당 내부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수행원들을 묘사한 모자이크화. 사진=위키백과



성당 건물은 로마 전통의 바실리카 양식과 성당 중심에 돔을 올리고 외곽을 팔각형 구조로 둘러싸는 비잔티움의 중앙집중식 건축 양식을 절충한 형태로 지어졌다. 통상적인 성당과는 달리 중앙에 있는 높이 약 30m에 달하는 내부 원형 돔을 중심으로 공간이 확장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 비탈레 성당은 내부의 모자이크 장식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다채로운 모자이크들은 6세기 비잔티움 예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가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묘사한 대형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각자 교회 예배를 주관하는 모습인 모자이크화는 당시 그리스도교 교리와 황제의 권위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사료기도 하다. 더구나 수천 개의 작은 조각(테스세라)을 벽면에 칠한 젖은 회반죽 위에 장인이 직접 손으로 각도를 달리해 일일이 박아 넣은 방식으로 제작해 빛의 반사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금박 유리와 어우러져 빛을 발산함으로써 한층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황금빛 옷에 하늘색 후광을 두른 채 성찬용 접시를 들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화가 가장 다채롭다. 이는 좌측에는 고위 성직자를, 우측에는 군인을 거느린 모습으로 황제의 종교적 권위와 군사적 승리를 동시에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예술 차원을 넘어 바로 성당 자체가 서로마 재정복의 정당성을 시각화한 공간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라벤나에 있는 다른 성당들도 나름대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모자이크화를 품고 있다. 그 덕분에 라벤나는 통상 그리스도교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모자이크의 수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산 비탈레 성당을 비롯한 라벤나 소재 성당들은 단순한 종교 건축 차원을 넘어 6세기 유럽의 정치, 군사, 종교, 그리고 예술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일종의 복합 문화유산이다. 로마 전통과 비잔티움 양식의 융합, 황제 권력의 신성화, 그리고 종교적 상징체계의 예술적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진한 즐거움과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특히 산 비탈레 성당은 표면적으로는 라벤나에서 순교한 한 로마 군인에 대한 헌정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신의 뜻에 따라 서방을 정복했다는 시각적 메시지를 담은 제국의 기념비였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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